2010년 8월4일 수요일, 전북 문단의 원로 문인들을 모시고 일본 센다이 지역 문화탐방에 나섰다. 몇 명 직장이 있는 분들의 일정을 조절하여 야마가타 하나가사 축제와 센다이 타나바타 축제를 체험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일본의 여름은 마쯔리(축제)의 계절이라나. 야마가타 지역의 하나가사(花笠) 축제는 꽃 삿갓을 소재로 한 축제이고 센다이 타나바타(七夕) 축제는 칠석을 전후해 상가에서 직접 만들어 쇼핑몰 앞에 내건 장식물이 장관이다. 둘 다 동북 4대 축제로 꼽힌다.

▲ 야마가타(山形)의 하나가사(花笠) 축제에서 시민들이 시가지를 행진하고 있다.
▲ 센다이(仙台) 타나바타(七夕) 마쯔리. 시민들이 손수 만든 장식물이 장관을 이룬다.
우리 일행의 평균연령은 60후반 정도로 배낭여행을 하기에는 어른들의 건강이 다소 염려가 되었지만 문화를 체험하고 느끼고 싶다는 한결같은 바람에 따라 자유여행으로 진행되었다. 센다이 공항에서 입국수속을 마치자마자 공항철도와 JR열차를 이용해 호텔에서 체크인한 후, ‘루푸르’라고 하는 순환버스를 이용해 시내 관광을 다니는 식이었다.

▲ 센다이 루푸르 버스. 시내 주요 관광지를 설명해준다. (일본어를 모른다면 큰 도움은 안된다)
여행 이튿날인 8월5일 목요일은 센다이에서 JR열차로 하나가사 축제가 열리는 야마가타(山形)로 이동하는 일정이다. 야마가타로 이동하는 도중 야마데라(山寺)에 들르기로 했다. 야마데라(山寺) 릿샤쿠지(立石寺)는 860년에 창건된 절로, 가파른 바위산에 들어선 사찰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절경이다. 산 아래에서 정상까지 이어지는 돌계단은 무려 1천15개. 랏샤쿠지에 닿기 위해서는 누구나 계단을 올라야 한다. 삼복더위에 땀을 수돗물처럼 쏟으며 한발 한발 힘든 발걸음을 옮긴다. 거의 탈진한 상태로 식당에 돌아와 소바를 먹고 다음 목적지인 야마가타로 이동하기 위해 다시 기차역으로 향했다.

▲ 야마데라 기차역 표지판.
라카에 맡겨두었던 가방을 찾아 플랫포옴에 설치된 간이 휴게소에서 땀도 식히고 ‘인증샷’도 찍으며 기차를 기다리다가 친절한 조시인이 출입문을 끝까지 잡아주어 가방 끌고 기차에 가뿐하게 오르니 피로도 좀 누그러 든 것 같았다. 문제가 생긴 것을 알게 된 것은 기차가 출발하고 난 후 두정거장 쯤 지나서였다.

▲ 시원한 에어콘아래서 땀도 식히며 인증샷을 날리던 야마데라역 간이 휴게소. 다소 피곤해도 여기까진 즐거웠다.
이번 여행의 총무를 맡게 된 조시인이 자신의 가방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조시인의 작은 배낭에는 여권은 물론 여행 경비가 몽땅 들어있었다. 우리 일행의 일본경비와 한국에 돌아갈 때 쓸 원화까지 한마디로 ‘돈 보따리’였던 셈이다. 조시인으로 말하자면 시(詩)는 물론 성품과 인격까지 신언서판(身言書判) 두루 갖춘 문인으로 위아래 모두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평소 맡은 일은 꼼꼼하고 완벽하게 처리해 실수가 없고 이번 여행에서도 몸을 사리지 않고 희생봉사의 모범을 보여온 터라 다들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의 가방이 보이지 않는다니 이게 웬 일이냐 싶어 한바탕 난리가 났다. 각종 추측이 난무했다.

1. 라카에서 일행 가방을 찾아주다 정작 자기 가방은 못 챙긴 것이다. 라카앞 의자에 떨어져있을 것이다.
2. 역 대합실에 있을 것이다. (조시인은 대합실에 간 적이 없다고 하니 여긴 아니다)
3. 화장실에 놓고 왔을지 모르니 거기도 찾아봐야 한다.

나는 문득 간이 휴게소 출입구와 의자 사이에 가방같은 걸 본 기억이 떠올랐다. 그 앞에 젊은 남자가 있던 모습까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사실 그 검은 가방이 젊은 남자의 것인 줄 알았다) 우리가 사진찍는 사이 가방이 밀려서 의자사이로 떨어진 것 아닐까? 이런 추론을 제시했더니 출입구와 의자사이에 공간이 없다는 반론이 돌아왔다. 기차는 계속 야마데라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고 그 와중에 승무원을 통해 야마데라역 직원과 통화하면서 짚이는 곳을 지적해주었는데 돌아온 답은 절망적이었다. 아무데도 가방이 없다는 것이었다.

▲ 야마데라 역에 들어서는 순간까지 가슴을 졸였다. 과연 가방이 건재할까?
조시인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그 와중에 몇 명은 ‘일본이니까 가방이 있을 것이다. 걱정마라.’ 라면서 일본에서 중요한 물건을 잃었다가 다시 찾은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화장실에 풀러놓고 깜빡 잊은 시계를 며칠이 지난 후 다시 그 장소에 갔더니 그대로 보관돼있더라는 이야기, 중요한 서류 가방을 호텔에 놓고 왔는데 본인보다 먼저 기착지에 도착해있었다는 이야기,, 호텔 로비에 두고 온 선물 가방을 손상없이 되찾았다는 이야기 등등 다양한 사례가 쏟아져 나왔지만 정작 조시인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지는 모르겠다. 오후1시42분에 야마데라를 출발한 기차는 1시58분 야마가타에 도착했다. 일행은 야마가타에 남고 조시인과 나는 야마데라로 가서 직접 확인해보기로 했다. 오후2시39분에 가장 빠른 기차가 있었다. 야마데라를 출발한지 거의 한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가방은 무사할까? 무거운 심정으로 야마가타에서 야마데라로 돌아가는 20여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다. 나는 솔직히 비관적이었다. 내가 본 것이 조시인의 가방이 맞다면, 그 앞에 서 있던 남자가 그 가방을 온전히 놔둘 리 없을 것이라는 불순한 생각이 마음을 짓눌렀다. 오후2시58분 다시 야마데라에 도착했다. 야마데라에서 가방을 잃어버린지 1시간16분 경과. 과연 가방의 행방은? 두구두구두구……. 퀴즈대한민국 결선 때보다 더욱 떨린다.

▲ 기적이 일어났다.
있었다! 긴 의자에 놓여있는 검은 가방 하나, 분명 조시인의 것이었다. 내 예측대로 의자와 출입문 사이 공간에 떨어져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누군가 가방을 주워서 찾기 쉬운 곳에 놓았다. 배려심이 느껴진다. 가방은 찾았는데 내용물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까보다 더한 긴장감. 두구두구두구두구……. 안전했다. 조시인이 지갑과 여권부터 확인했는데 가방 속 내용물은 건재했다. 누군가 지퍼를 열어본 흔적도 없었다.

야마데라에 있는 일행에게 가방을 찾은 사실을 알렸더니 올림픽 금메달 소식보다 더 큰 함성이 전화기너머로 울려 퍼진다. 거봐라,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일본이니까. 동남아면 어림도 없겠지만.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새로웠다. 만약 그대로 가방을 잃어버렸다면 이번 여행은 어떻게 되는 걸까? 조시인은 센다이 영사관에서 임시여권을 발급받아야 할 것이고 경비가 없으므로 이대로 한국으로 귀국하거나 어디 한군데서 꼼짝않고 시간을 축내야 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각 개인들의 여행에 대한 설렘과 기대는 어떻게 보상을 해줄 것인가? 조시인의 머릿속은 복잡했을 것이다.

한편으로 나는 이러한 현상이 신기하기만 했다. 우리 일행이 야마데라를 떠난 후 상,하행선이 세차례 지나갔다고 한다. 고즈넉한 시골마을이지만 이름있는 명승지여서 관광객이 끊임없이 오간다. 적어도 세 번 이상 관광객이 이 간이 휴게실을 거쳐 갔을 것이다. 우리가 떠난 후 처음 들어선 관광객이 구석에 떨어진 가방을 발견해서 의자에 올려놨을 것이고 그 후로도 두차례 더 사람들이 드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그 가방을 열어본 흔적이 없으며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학교 교육에서부터 비롯된 정직한 국민성이라고도 하고, 섞이기 싫어하는 일본 국민들의 개인주의적인 경향에서 비롯된 일이라고도 하고, 해석은 다양했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물건이 안전하게 돌아온 경험을 한두번쯤 공유하고 있었다. 전북 김제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K시인은 조시인이 가방을 찾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했다.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K시인 역시 김제 체련공원 벤치에 지갑을 두고 왔는데 한시간 후 다시 갔더니 그 자리 그대로 놓여있더라고 했다. 정작 나만 의심과 불신의 눈초리로 사회를 바라본 것이 아닌가 부끄러웠다. (잠시나마 의심했던 젊은 총각에게 크게 미안했다.)

광복절을 맞으며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과 아픔을 안겨준 일본이지만 야마데라에서의 특별한 경험은 또 다른 화두를 던져준다. 배울건 배워야겠구나. 잃어버린 가방을 찾는 일이 어느 사람에게는 당연한 귀결이지만 나에게는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찾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아닌 확신과 신뢰를 가진 분들의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부럽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였다. 하여 나는 나의 불신감을 타파하고 잃어버린 가방을 찾을 때의 벅찬 감동과 같은 감정을 지속할 수 있도록 마음가짐을 새로이 하여야겠다. 어차피 지역에서 알콩달콩 살맛나는 이야기를 라디오에 버무려낼 바에야 더욱 깊이있고 폭넓은 공감대로 향유할 수 있는 가치있는 스토리를 찾아서 고군분투하리라. 구석구석 헤집으면 무더위를 시원하게 날릴 수 있는 유쾌 상쾌 통쾌한 소식이 없겠는가? 시절은 수상하고 민심은 흉흉하지만 그래도 노력하고 연마하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란 희망을 잃지 말아야겠다. 거듭 느끼지만 인간성 회복만이 그 첩경이다. 가방을 잃어버려도 불안하거나 초조하지 않도록 열흘 전 잃어버린 귀중품을 열흘 후 그 자리에서 그대로 발견할 수 있도록, 믿고 또 믿고 믿을 수 있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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