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Globalization’라는 말은 이제 ‘정보화’라는 말과 함께 우리에게 일상용어가 되었다. <세계무역기구WTO>가 정식 출범한 1995년은 ‘세계화의 원년’이었다. ‘세계화’라는 말을 모르면 세련되지 못한 사람으로 취급받기 일쑤이다. 그런데 정작 세계화의 본질을 명쾌히 밝히는 말이나 글은 별로 세계화되지 않은 것 같다.”

옮긴이 서문의 첫 머리를 장식하는 이 글귀는 두 가지 현실, 즉 하나는 세계화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통제하는 가장 강력한 이념이 되어 우리를 포위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마치 남의 일인 양 세계화라는 압도적인 흐름에 우리가 한없이 무관심하고 무지하다는 것이 13년이란 꽤 긴 시간이 흐른 지금도 놀랍도록 유효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특히나 후자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것은 이 분야의 고전이 된 <세계화의 덫>과 나란히 이 나라 군 당국으로부터 ‘불온서적’으로 낙인찍힌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도 근본적으로 동일한 ‘앎의 필요’가 거듭해서 강조된다는 점이다. 일찍이 전작 <사다리 걷어차기>에서 “선진국들의 경제 발전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 더 많이 알려져야 한다.”고 했던 장하준은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형편없는 ‘성장’ 기록은 당혹스러울 정도”이지만 ‘역사에 대한 건망증’에 빠진 부자 선진국들이 “왜곡된 역사적 기록을 퍼뜨리는 의도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패를 감추고자 하는 데 있다.”며 진실을 곡해하고 감추려드는 오만한 태도를 더 강도 높게 비판했다. 거기에다 ‘불온서적’ 운운하는 딱지를 붙이는 시대착오적 망상과 무지를 만방에 드러내고 말았으니, 말글이 세계화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보다 더 극적인 사례가 어디에 또 있을까.

‘민주주의와 삶의 질에 대한 공격’이라는 섬뜩한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세계화 이후의 세계를 일찍이 ‘20대 80의 사회’란 명쾌한 표현으로 규정한 바 있다. 전 세계 국가들 가운데 상위 20%에 속하는 부유한 나라들은 지구 전체가 생산하는 부의 84.7%, 전체 무역량의 84.2%, 총 국내 저축액의 85.5%를 차지하고 있다. 또, 상위 20% 국가들은 전 세계 나무 사용의 85%, 금속 가공의 75%, 에너지 사용의 70%를 점유한다. 하나의 시장이 곧 하나의 세계라는 서구식 발전 모델, 이른바 서구식 문명화 프로젝트는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가 고루 잘 사는 참된 세계화의 비전, 신자유주의의 장밋빛 복음을 이 땅에 가져다주지 않았다. 도리어 지구적인 규모에서 선진국과 후진국의 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개별 국가 안에서도 경제적 양극화는 나날이 가속화한다. 부자 나라가 가난한 나라에 주는 원조는 해마다 줄고, 후진국은 하루가 멀다 하고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부채에 허덕인다. 사회적 부(富)에서 노동자의 임금이 차지하는 몫은 갈수록 줄고, 비정규직과 일용직 노동자는 늘어만 간다. 승리의 달콤한 열매는 소수가 독차지하고, 나머지 다수는 패배자로 남는다. 맹목적인 효율성 경쟁과 임금 인하를 기반으로 진행되는 범지구적 경쟁이 불러온 결과는 참담하다. “시장은 좋고 국가 개입은 나쁘다.”는 신자유주의의 이념은 이 세계에 성공이란 얼굴을 보여주기는커녕, 도리어 온 세상의 하향평준화를 가져오고 말았다. 어떤 이가 말한 대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 경제발전 모델로부터 기꺼이 이탈하는 것이 결코 “불행으로 가는 비참한 행진”이 아니라 오히려 “행복의 새로운 길로 가는” 지름길인 셈이다.

저자들은 세계화 시대 국제 경제의 흐름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무대로 국제금융시장의 폭력적 현실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자유로운 무한 국경시장에서 부를 빨아들이며 지구촌을 농락하고 있는 정체 모를 거간꾼들(다국적 은행, 보험사, 투자기금회사 등)의 투기와 탈세는 전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복지모델로 꼽혔던 스웨덴에서조차 사회보장 프로그램의 제한과 예산 삭감이라는 혹독한 후유증을 낳았다. 외환위기 이후 외국인의 직접투자가 허용된 국내에서도 기업이나 금융기관이 언제든 탐욕스런 투기자본의 먹잇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SK글로벌-소버린, 외환은행-론스타 사례는 무국적 자본의 가공할 폭력성을 여지없이 입증했다. 전 세계가 하나의 시장이 돼버린 오늘날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개별 국가의 금융시장이 외부의 충격에 얼마나 방어력과 내성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인 것이다. 지금은 다소 잠잠해진 미국발 금융위기가 한때 전 세계 경제를 요동치게 만들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서브프라임모기지라는 파생상품의 정체를 알게 됐지만, 저자들은 이미 십 수 년 전에 파생상품의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파생상품 거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이는 금융업에 엄청난 위험 및 불확실성을 증대시켰을 뿐만 아니라, 수십 년 간에 걸쳐 구축된 금융업의 안전장치들이 온통 뒤범벅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점이다.” 저자들이 경고한 범지구적인 금융대란, 다시 말해 대파국의 개연성을 현실로 확인한 셈이다.

‘20대 80의 사회’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일자리가 급격하게 줄어든다. 정규직이 시간제 근로나 임시 계약직, 이른바 비정규직으로 대체된다. 당연히 임금 수입이 줄어든다. 탈규제화, 자유화, 민영화라는 이름으로 생산성을 높이고 비용을 줄이기 위해 기업이 선택하는 방법은 조직축소(다운사이징), 외부하청(아웃소싱), 구조조정(리엔지니어링)으로 압축된다. 정리해고 - 자회사 설립 - 노조 와해로 이어지는 이 악순환의 고리에서 희생되는 것은 언제나 임금노동자들이다. 오죽했으면 <뉴스위크>가 임금과 일자리를 지속적으로 줄이면서 유지되는 미국식 경쟁력에 ‘킬러-자본주의’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그럼에도 “슬픈 사실은 이 다운사이징이 주주들과 경영자들한테 이익이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주주 중심주의란 결국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업의 모든 활동을 정당화해주는 무시무시한 논리인 바, 신자유주의의 신봉자들도 이런 결과를 처음부터 예측할 수 없었을 테고, 정책 입안자들은 ‘터보 엔진을 단 세계화’의 속도를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자유무역은 철저한 희생을 강요한다. 생태계와 건강보호, 민주주의, 인권은 국가적 차원에서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기만 하면 얼마든지 부차적으로 취급될 수 있어야 한다! 권위주의 정부의 출현이, 우익 선동가들의 등장이 예서 이해된다. 저자들 말마따나 “정치가 경제에 대해 무능하게 되면 국가는 그 대안으로 내세울 것이 없기 때문에 갈수록 권위주의적으로 흐르게 된다.”

이쯤 되면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본고장 미국에서 가장 혹독한 비판에 직면하는 까닭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세계화’를 민주주의의 시각에서 보면, 자기가 숨겨놓은 덫에 스스로 단단히 걸려들어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망치고 있는 셈이다.” 저자들은 묻는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까지 시장과 공존할 수 있는가? 울리히 벡이 말한 것처럼 ‘그들의’ 시장자유주의가 민주주의적 문맹임을 확인한 마당에 정작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한미 자유무역협정 관련 기사가 방송과 신문을 연일 장식하고 있는데, 쇠고기와 자동차 시장을 활짝 열어젖히라는 미국의 요구에 이 나라 정부는 어떤 답을 내놓을까? 불행하게도 권위주의 정부가 통치하는 국가의 국민에게는 그런 고민조차도 불필요한 사치로 여겨질 것이고, 사람들은 끝내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것이며, 브레이크 없는 세계화의 속도로 인해 우리의 삶은 ‘덫’에 걸려 나날이 황폐해질 것이다. 그런 암울한 미래를 곧이곧대로 되뇌이고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서는 선진국들의 경제 발전에 관한 역사적 사실과 세계화의 진실을 더 많이 알아야 한다. 옮긴이의 말대로 수단과 목적이, 주체와 객체가, 경쟁과 합리성의 가치가 전도된 ‘병든 사회’에서 현실에 순응하며 생존의 논리를 같이 만들어가는 ‘공범’이 되지 않기 위해, 다 같이 불온서적을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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