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의 트위터 이슈는 <김어준의 뉴스공장>이었다. 적잖이 기사도 발행됐고, SNS와 커뮤니티에서는 비판과 옹호가 공방을 벌였다. 키워드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김부선, 주진우는 왜 안 부르냐?”는 장진영 변호사의 말과, “어떤 이슈를 어떻게 선택해서 어떻게 말할지는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라고 맞받아친 김어준의 말이다.

김어준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선택적 정의‘니 ’친목질의 폐해‘ 등의 단어들을 자주 사용했다. 반면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방송에서 다룰 소재를 결정하는 것은 편집권으로서 타인이 왈가왈부할 대상이 아니라는 논리로 맞섰다. 그러나 새삼스러운 현상은 아니었다. 소위 이재명 의혹이 발생한 이후로 김어준과 주진우에 대한 비판과 논란은 멈추지 않고 있다.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

김어준은 이제 라디오에서, 지상파 방송까지 두루 장악한 걸출한 언론인이 되었지만 지금의 그를 만들어준 <나는 꼼수다> <파파이스> 등에서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었다. “이걸 언론이 제대로 다루지 않아요”라는 말이었다. 김어준은 시민들의 궁금증과 의심을 귀신같이 콕 짚어 다룰 줄 알았다. '이걸'은 소위 뉴스에 나오지 않는 진실을 의미한다.

언론에서 다루지 않는 ‘이걸’ 다뤄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김어준과 주진우가 요즘 ‘이걸’ 회피하고 있다. 급기야 “어떤 이슈를 어떻게 선택해서 어떻게 말할지는 저희가 알아서 한다”며 기성언론의 오만함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김어준과 주진우라면 ‘이걸’ 피하면 안 된다. 누군가는 확증편향이라고 이들을 옹호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말은 필요 없다. 진실은 단순하다고 하지 않는가.

김어준은 자신의 저서 <닥치고 정치>를 통해 ‘뉴스의 진짜 힘은 뭔가를 다루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다루지 않는 데 있다. 다루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거고, 그게 진짜 권력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언론들의 이슈 선정의 폐쇄성에 대한 비판이었고, 이 또한 많은 이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이심전심이었다.

김어준의 말대로 과거 언론은 다뤄야 할 사건들에 대해서 애써 침묵했고, 보도하지 않아도 좋을 엉뚱한 것들로 지면이나 방송 뉴스를 구성했다. 과거 MBC <뉴스데스크>의 ‘비오는 날에는 소시지빵’은 두고두고 회자가 되는 불필요한 보도의 상징처럼 되었고, ‘형광등 100개의 아우라’ 운운은 권력의 시녀가 된 언론의 추한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다.

SBS 시사프로그램 <김어준의 블랙하우스>

그래서 SBS <김어준의 블랙하우스>에서 김어준은 “답을 얻지 못한 질문들이 너무 많다. 그러나 한 가지만 약속하겠다.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겠다”는 약속은 더욱 빛을 발했다. 그 약속은 지켜졌다. 시민들과 함께한 ’다스는 누구겁니까?’라는 질문은 전 국민적인 공감을 끌어냈고, 이명박 전 대통령은 교도소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김어준과 주진우는 지난 9년간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모두의 취향에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언론이 하나 같이 입을 닫고 우민 보도에 골몰할 때 이들이 반기를 든 것은 매우 위험했고, 숭고한 일이었다. 그들의 팟캐스트 방송을 들으며 시민들은 마음껏 분노를 충전했고, 그렇게 자란 분노가 촛불광장의 한 축을 이뤘다. 이들을 박근혜 탄핵의 수훈자로 일컫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들이 영웅이고 우리 편이라고 해서 비판이 용납되지 않는 성역 안에 존재할 수 없다. 그들 역시 성역에 고이 모셔지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그들을 비판한다고 소위 ‘죽이기’라고 엄살을 피울 일도 아니다. 오히려 말하지 않는 것이 '죽이기'가 될 수 있다. 시민은 어떤 대상에게도 질문할 수 있다. 그 권리는 누구도 제한할 수 없다. 기자가 질문을 못하게 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할 정도인데, 하물며 주권자인 시민의 질문을 무슨 수로 막겠는가.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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