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파업이란 걸 난생 처음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파업이란 게 생각보다 참 힘들었습니다. 일 안 하고 노니 좋은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정신적으로 불안한 게 꽤 괴롭습니다. 정신적인 불안함은 두려움 때문인데요. 왜 두려울까요? 모르기 때문입니다. ‘파업이 어떻게 끝날까’ ‘파업이 끝난 뒤 난 어떻게 될까’ ‘회사는 좀 변할까’ ‘파업 참여율은 얼마나 높을까’ ‘외부의 시선은 어떨까’ 등등. 전 어떤 질문에도 답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과연 우린 파업을 해야 할까’ ‘파업이 정말 옳은 것일까’란 의문에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저란 존재는, 아니 인간은 제대로 아는 게 거의 없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의 이해력은 너무나 부족한데요. 철학자 올리비에 푸리올은 이런 인간을 두고 “인간은 장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19)라고 말합니다. 결국 절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드는 건 부족한 이해력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제 모습이었습니다. 두렵다, 무섭다 말하면서도, 꼬박꼬박 파업현장에 나간 겁니다. 동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의 이해력도 유한한 건 매한가지며, 때문에 그들도 몹시 두려워할 겁니다. 하지만 모두들 적극적으로 파업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의지의 힘 때문일 겁니다. 우리의 의지엔 한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인간은 무언가를 이해하지 못했을 때도, 우리 의지는 그것을 ‘참’이라고 긍정할 수 있습니다.”(19) 다시 말해 파업이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더라도, 행동할 수 있는 의지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푸리올은 “의지가 무한하기 때문에 문제를 야기한다 하더라도, 한편으로 그 무한성 덕에 문제의 해답을 구하기도 한다”(19)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의지가 모여 발생한 파업은 현재 회사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될 지도 모릅니다. 이 때문에 의심의 철학자라 불린 데카르트조차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할 때는 생각을 하지마라”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스튜디오 필로: 철학이 젊음에 답하다>의 저자, 올리비에 푸리올의 얘기를 좀 더 들어보겠습니다. “만약 자신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 미리 아는 경우에만 행동하기로 결심한다면, 우리의 이해력은 그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의지보다 우위에서 의지를 억제하면서 자신이 인식하는 것만을 욕망하도록 의지를 제한할 것입니다. 그것은 대단히 순조롭고 안락하지만 완전히 고립된 삶입니다. 모든 차이와 위험, 새로움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삶, 간단히 말해 순전히 자급자족적인 삶, 즉 죽음과 흡사한 삶이겠죠.” 그렇습니다. 실제로 우린 이번 파업이 어떻게 될지 전혀 모릅니다. 그래도 가만히 앉아 죽음과 흡사한 삶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의지는 이미 현 상황의 ‘참’과 ‘거짓’을 판명해, 우리를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하루는 회사의 한 경영진이 적극적으로 시위하는 후배에게 ‘뭣도 모르고 행동하지 말라’는 식으로 말한 적이 있습니다. 데카르트의 생각과 정면으로 위배되는 말을 한 셈인데요. 위에서 언급한대로 우린 뭔가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모든 것을 완벽하고 알기 전까진 절대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는 그 분의 지적은, 한 마디로 영원히 닥치고 살라는 말 밖에 안 됩니다. 나이 든 경영진이 생각하는 ‘행동 임계점’이 우리보다 훨씬 높을지는 모릅니다. 그래도 ‘어린놈들이 뭣도 모르고 무모하게 행동한다’는 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됩니다. 무한한 의지로 욕망하는 데는 지식과 나이가 상관없기 때문입니다. 그 분께 데카르트의 말을 대신 전합니다. “이해력이 열쇠를 제공하지 못할 때, 행위로 이끄는 데 필요한 결단력을 제공해주는 것은 바로 의지이다. 행위는 실천하기로 결단해야만 단호하게 밀고 나갈 수 있습니다.”(21)

무한한 의지로 자유롭게 욕망하는 것. 바로 여기에서 ‘자유’라는 의미가 도출됩니다. ‘자유’라는 말은 지겹게도 많이 들었지만 막상 ‘자유’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과연 인간에게 자유라는 것이 있기는 할까. 결국 복잡하게 구성된 사회의 조작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는 아닐까.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매트릭스 안에 사는 사람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의심이 듭니다. 하지만 우리의 욕망은 무한하게 움직입니다. 우린 자유롭게 욕망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욕망에서 자유의 흔적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욕망이 곧 자유로 이어지는 건 아닙니다. 자유로운 욕망은 인간의 의지라는 틀을 거쳐 행동으로 연결될 때, 비로소 ‘자유’라는 개념이 떠오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르누비에는 “만약 자유가 필연적이라면, 자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2+3=5’는 필연적인 법칙입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2+3=3’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유는 ‘2+3=5’같은 법칙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유롭다’라는 법칙도 없습니다. 르누비에는 만약 ‘인간은 자유롭다’라는 법칙이 존재한다면, 그 순간부터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고 말한 겁니다. “자유는 증명되지 않습니다. 자유는 우리 의지의 행위입니다. 자유는 우리가 확인하는 소유권이 아니라, 우리가 내리는 결정입니다. … 자유는 관념이 아니라 행위라는 것을 내면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철학을 할 수 없습니다.” (122-123) 결국 광장을 가득 채운 파업의 현장이 곧 ‘자유’입니다. 유한한 이해력 때문에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면서도, 광장에 모여 자존감을 지키려는 동료들을 보며, 전 ‘자유’라는 개념을 이해합니다.

그런데 파업 참가자나 불참자 중에는 이런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를 포함해서요) ‘만약 내가 파업에 참여하지 않으면 친한 동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을까’ ‘다 파업하니 나도 그냥 같이 해야지’라고 생각해서 파업에 참여한 사람. 반대로 ‘파업에 참여하면 이번 승진에 실패할지도 몰라’ ‘팀장과의 의리가 있는데 내가 어떻게 파업에 참여하겠어’라고 생각해서 파업에 불참한 사람. 어쩌면 제 내면 깊은 곳에는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신경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신경이 절 파업현장에 끌어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데카르트나 스피노자는 제 행동이 ‘고매한’ 행동이 아니라고 말할 겁니다.

▲ 올리비에 푸리올의 모습. 2005년부터 매주 토요일 파리 13구역의 영화관 MK2에서 진행된 올리비에 푸리올의 철학 강의 ‘시네필로’는 바칼로레아 시험을 앞둔 프랑스 고3 학생 및 젊은 철학도들에게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냈고, 이 같은 호응에 힘입어 2008년 프랑스 오랑주 TV의 〈스튜디오 필로〉라는 프로그램으로 제작되어 프랑스에 새로운 철학 읽기 바람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데카르트는 “고매함이란 자신에게 자유를 주는 것, 자신을 믿는 것, 욕망하겠다고 스스로 약속하는 것”(196)이라고 말했습니다. 스피노자는 능동적 인간과 수동적 인간을 구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자신이 적합한 원인일 때 우리는 능동적이고, 부분적인 원인에 불과할 때는 수동적입니다.”(225) 즉, 이번 파업이 전적인 제 신념 때문이라면, 전 능동적인 인간이고, 남의 시선 때문에 못 이겨 나왔다면 수동적인 인간입니다. 물론 능동과 수동을 칼로 무 썰듯 구분하긴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우린 노력할 수는 있습니다. 능동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고매한 행동을 하기 위해 애쓸 수 있습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자유는 결코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해서 사용할 때 존재하는 겁니다. “선택하는 것, 그것은 자신의 자유를 존재하도록 하는 행위입니다. 그처럼 자유는 오직 사용할 때만 존재한다는 이상한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196) 때문에 경영진이 보내는 협박 문자를 보고 회사에 돌아간다면, 전 선험적으로 주어진 제 자유를 제 발로 차버리는 꼴이 되고 맙니다. 회사 경영진도 수동적이고 고매하지 못한 후배들이 자랑스럽진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제가 어찌 회사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프랑스의 젊은 철학자 올리비에 푸리올은 <스튜디오 필로: 철학이 젊음에 답하다>에서 영화를 통해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난해한 철학을 쉽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물론 쉽게 풀어낸 결과물도 쉽지만은 않습니다.) 덕분에 전 책을 읽는 내내 철학을 좀 더 가깝게 만나는 쾌락을 만끽했습니다. 전 철학은 행동과 연결될 때만 의미가 있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철학을 최고의 실용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을 통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프랑스 철학자 뤽페리는 심지어 서양 철학사를 다룬 자신의 저서 제목을 <사는 법을 배우다>로 짓기도 했습니다. 올리비에 푸리올 역시 각 챕터의 제목을 ‘~사용법’이라고 붙였습니다. 그리고 의지, 자유, 의심, 고매함, 모방, 상상력 등의 사용법을 알려줍니다.

물론 실천하기 어려운 내용들입니다. 하지만 어둠과 안개로 가득했던 삶의 여정에 희미한 불빛이 밝혀진 기분이 듭니다. 이게 바로 철학을 만날 때의 쾌락입니다. 올리비에 푸리올이 알려준 사용법을 얼마나 잘 사용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번 파업은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올리비에 푸리올은 젊음의 질문에 철학으로 답을 해줬습니다. 이제 행동으로 스스로의 자유를 만들어 내야 할 때입니다.

책, 영화, 여행을 통해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추구하는 부지런한 블로거, ‘알스카토’입니다. (http://blog.naver.com/haine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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