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도우리 객원기자] 여성의 가슴은 남성의 가슴보다 더 큰가? 너무 당연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질문이다. 가슴이 아주 작은 여성이나 근육, 여유증 등으로 가슴이 발달된 남성이 있긴 하지만, 보통 성인 여성의 가슴은 성인 남성의 것보다 훨씬 두드러지는 신체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성의 가슴은 남성의 가슴보다 ‘훨씬 작다’고 할 수 있다. 물리적 크기는 여성의 것이 더 크더라도 가슴이 소비되는 방식이 남성에 비해 협소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여성의 가슴은 모유 수유나 성적인 어필(수동적이든 능동적이든) 및 성감대라는 기능적·수단적 의미에 국한돼 있다. 반면 남성의 가슴은 성적인 기능 외에 ‘몸 그 자체’라는 의미까지 확보돼 있는 데다 후자의 의미가 더 압도적이다. 무엇보다 여성의 가슴에는 남성에 비해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단단히 덧씌워져 있다. 그래서 여성은 보통 한여름에도 브래지어를 착용해야 하거나, 평소 너무 가슴이 부각되지 않도록 자기검열 하는 등 자유롭지 못한 경우가 많다.

불꽃페미액션 페이스북 본사 앞 나체 시위(연합뉴스)

그래서 여성의 가슴은 빈번히 대상화되며 여성 자신으로부터 소외돼 왔다. 커다란 가슴 뷰티 및 수술 산업과 시기별로 유행하는 예쁜 가슴 모양, 각 가슴 사이즈 및 모양을 가리키는 세세한 별칭의 존재가 그렇다. 반면 남성의 가슴은 몸 자체로 부각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남성은 더울 때 비교적 쉽게 상의 탈의를 할 수 있는데다 분노할 때 위협의 수단으로 ‘웃통 까기’도 가능하다.

최근 여성 단체 ‘불꽃페미액션’이 페이스북의 가슴 검열에 반대해 열었던 ‘나체 시위’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여성 가슴에 ‘신체 그 자체’라는 자리를 마련하고 확보하려는 시도였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나체 시위’는 사실상 나체가 아니었다. 여성의 가슴에 모유 수유와 성적 기능 외에 신체 그 자체라는 모습까지 있음을 적극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나체 시위’는 다 같이 벗고 다니자고 하거나, 성적인 부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의 가슴을 ‘성적인 부위로만 소비하지 말라’는 외침이다.

그래서 이번 나체 시위에 대한 대중들의 불쾌감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애초에 나체 시위가 노린 것도 그 ‘불쾌함’이다. 여성 가슴에 대한 기존의 ‘모유 수유’나 ‘성적 어필’이라는 기능적 관점만으로는 명확히 해석할 수 없는 ‘인식의 어지러움’을 일으키려는 시도였기 때문이다. 여성이 길거리에서 가슴을 드러낼 때 적용되는 ‘공연음란죄’ 속 음란(淫亂)이란 말에도 이 ‘어지러움’이 표현돼 있다. 음란이란 기존의 성적 규범으로 규정할 수 없는 대상을 규정짓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또 ‘음란’이란 규정은 그러한 어지러움을 ‘드러내지 말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여성 가슴 뿐 아니라 성 소수자 등 음란으로 치부되는 많은 경우가 비 가시화의 압박을 받는 이유다. 최근 김문수 자유한국당 서울시장 후보가 동성애 반대 공약으로 ‘서울광장에서 열리는 퀴어축제를 허가하지 않겠다’고 발언한 것도 그 예다. 그래서 음란 규정에 대항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번 나체 시위는 ‘나는 가슴을 드러낸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하는 목소리에 다름 아니다.

나체 시위에 대한 지적 중 ‘언제는 시선강간 하지 말라면서, 자진해 노출하는 것은 모순 아닌가’라는 반응이 많았다. 잘못 짚은 지적이다. 이번 시위는 ‘관음적 시선을 허용한다’는 의미에서의 ‘노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시선을 고스란히 보는 이에게 되돌려 주는 노출이었다. 즉 나체 시위의 노출은 그 기존의 시선을 문제적으로 ‘쳐다본다’는 점에서, 그 시선을 역으로 노출하는 행위다.

음란에 대한 기준은 가슴의 모양과 촉감만큼이나 다양하고 유동적이다. 시대별로, 문화별로 판이하다. 이번 나체 시위를 계기로 여성 가슴에 대한 공연음란죄와 검열 기준은 재고되어야 한다. 미국은 이미 51개 주 중 14개 주에서 여성의 가슴 노출을 불법이 아니라고 명시하고 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음란한 쪽은 가슴일까, 그 가슴을 음란하다는 이유로 제멋대로 소비하는 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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