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반도체와 백혈병 (박일환·반올림, 2010)
그곳은 고립된 섬이었다. 아니, 그들만의 전쟁터였다. 하늘에서 무시로 떨어지는 최루액 폭탄에 살갗이 벌겋게 녹아내리고, 사방에서 쉴 새 없이 날아드는 새총 공격에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상처를 입었다. 물과 전기 공급이 끊기면서 먹을 수도 씻을 수도 없는 악조건이 몇날 며칠 이어졌다. 밤낮 없이 되풀이되는 회유와 협박의 언어로 점철된 선무방송 소리가 지친 몸에서 토막잠을 쫓아냈다. 혹시 모를 공권력 투입에 대비하기 위해 사람들은 눈꺼풀 위로 하염없이 쏟아지는 잠의 유령을 쫓아가며 밤새 어둠 저편을 응시했다. 매일 똑같은 주먹밥 한 덩이로 주린 배를 채워야 했고, 섬 건너편에서 살수차가 소화전을 열고 물을 공급받는 그 얼마의 시간에만 땀에 푹푹 전 몸을 씻고 묵혀뒀던 빨랫감을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살수차에 물이 가득차면 섬에 갇힌 사람들은 다시 그 세찬 물줄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질기게 버텨야 했다. 치료를 받을 수 없는 동료들이 눈물을 훔치며 섬 밖으로 하나둘 떠날 때마다, 더는 회사로부터 바랄 게 없다며 보따리를 싸들고 바리케이드 너머로 사라질 때마다 남은 이들은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는 회한과 울분을 속으로만 한없이 삭여야 했다. 이길 수 있을까? 섬을 떠나는 그날 우리는 승리자가 되어 있을까? 저 달이 차기 전에 그토록 사무치게 보고 싶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흡사 전쟁을 방불케 했던 쌍용차 노조원들의 옥쇄 파업, 그 77일 간의 기록을 담은 다큐멘터리 <저 달이 차기 전에>는 불과 1년 전에 그것도 이 땅에서 벌어진 일이라곤 도무지 믿기지 않는 불행하고 끔찍한 상처를 그야말로 처절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2405명이 정리해고 통보를 받았고, 많은 이가 감옥에 갔으며, 고통스러운 현실을 견딜 수 없었던 몇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시름시름 앓던 이들이 하나 둘 세상을 등졌다. 옥쇄파업 1년,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고 후유증은 여전히 계속된다. 처자식 먹여 살려보겠다며 그저 묵묵히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다는 쌍용차 노조원들은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공권력 앞에 분루(憤淚)를 삼키며 끝내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들에게만은 헌법이 부여한 기본권이, 인권이, 노동자의 권리가 허락되지 않았다. 권력에 장악된 주류언론은 폭력노조라는 비방과 손가락질을 화면과 지면에 담아 나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야만적인 권력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마음에서 공감과 연대의 정신은 사라진지 오래. 노조 가입률 10.3%, 노조 전임자 숫자를 법으로 제한하고, 정규직을 대량 해고해 비정규직을 만드는 전무후무한 노동 탄압 국가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1년 전, 섬 밖에서 그 처절한 생존 투쟁을 구경만 하고 있던 나의 뒤늦은 파업 투쟁은 그래서, 더, 무겁다. 나는 기득권이었고, 배부른 파업 노동자였으며, 보름 넘도록 싸워온 지금까지도 상처 하나 없이 건재하다.

▲ 고 황유미씨.
지방 상고 출신의 열아홉 꽃다운 청춘에게 ‘삼성’이라 불리는 대기업에 취직한다는 것은 얼마나 기쁘고 가슴 뛰는 일이었을까. 돈을 벌어 남동생을 대학에 보내겠다는 누나의 부푼 꿈은 그러나 오래 가지 않았다.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 입사한지 2년도 채 안 돼 나타나기 시작한 몸의 이상 증세. 이름도 생소한 ‘급성골수성백혈병’이었다. 휴직을 하고 치료를 받고 골수이식 수술을 받고 복직을 해야 했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투병 중에 회사에서 환자의 아버지를 여러 차례 찾아왔다. 사직서를 써야 한다. 산재 처리를 해 달라. 이 큰 회사를 상대로 이길 수 있으면 한 번 해봐라. 못 이긴다. 산재 말고 다른 걸 요구해라. 병원비를 물어내라. 사직서 쓰면 다 물어준다. 그래서 백지 사직서를 써줬다. 얼마 뒤 회사 사람들이 다시 찾아와 현금 5백만 원을 건넨다. 이것밖에 없으니 이걸로 끝내자. 병원비 등으로 쓴 돈은 자그마치 8천여만 원. 회사 보험과 사내 모금 등으로 4천만 원을 받았지만, 나머지는 5백만 원으로 끝내자는 거다. 얼마 뒤 회사 사람들이 또 다시 찾아왔다. 회사는 개인 질병이라 했다. 아무리 산재 처리를 해달라고 해도 말이 통하지 않았다. 2007년 3월 6일, 아무런 약속도 받지 못한 채 스물셋 꽃다운 젊음은 아버지가 모는 차를 타고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조용히 숨을 거뒀다.

이른바 삼성 반도체 백혈병 문제를 처음 ‘문제’로 인식하게 만든 황유미 씨의 사연이다. 아버지 황상기 씨는 딸의 억울한 죽음 뒤에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회사 측의 회유를 뿌리치고 2007년 6월 1일 근로복지공단 평택지사에 산업재해보상보험 유족급여를 신청하며 거대 기업 삼성과의 길고도 지난한 싸움을 시작했다. 고(故) 황유미 씨가 일하던 반도체 작업장은 제품 생산의 특성상 먼지 하나 티끌 한 점 허락되지 않는다 해서 이른바 ‘클린 룸’으로 불린다. 하지만, 반도체 라인에서 일하다 백혈병을 얻은 삼성 직원들의 진술에 따르면, 직원들이 순백의 방진복을 입고 일하는 이곳 작업 환경은 반도체 제품과 설비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법이 정해놓은 안전교육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황 씨가 숨진 이후 삼성은 직원들을 철저하게 입단속하고 황 씨가 일하던 3라인을 새로 보수했다. 역학조사는 새로 보수된 라인에서 회사가 제공하는 자료와 시설에 대한 점검만으로 이뤄졌다.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된 ‘그들만의 조사’였다. 실제로 지난해 2월 12일 삼성반도체 온양공장 역학조사에 직접 참여한 백혈병 환자 송창호 씨는 자신이 근무하던 때와 현장이 한 군데도 같지 않다고 했다. 삼성반도체 백혈병 문제를 취재하면 삼성 측에선 매번 똑같은 제안을 해온다. 반도체 라인을 투명하게(?) 공개하겠다고.

삼성 반도체라인에서 일했던 많은 여성은 유산, 생리불순, 하혈, 피로, 스트레스, 면역력 저하 등에 만성적으로 시달려야 했다고 증언한다. 미국 노동통계국(BLS)의 2003년 통계를 보면, 화학물질 중독사고 발생 건수가 전체 노동자는 만 명당 0.3명인데 비해 반도체산업은 6명으로 무려 20배에 이른다. 그런데도 미국이고 한국이고 반도체 관련 기업들은 구체적인 유해물질 정보를 공개하지 않을 뿐더러, 희귀 질환에 걸린 노동자의 건강에 대한 책임조차 회피하고 있다. 2007년 11월 20일,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뜻을 모아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규명과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대책위원회’를 꾸리고,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에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cafe.daum.net/samsunglabor) 카페를 열었다. ‘삼성에는 없는’ 노조를 대신해 대책위는 노동부에 공식 역학조사를 요구하고,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신청을 했다. 노동부가 이듬해 1월 31일 보도자료를 통해 반도체 제조업체 근로자 건강실태 일제조사를 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대책위의 조사 활동 참여를 거부하고, 조사 결과도 공개하지 않았으며, 정보공개 청구도 묵살했다. 대책위가 백혈병 환자 숫자와 반도체 제조공정에 사용되는 화학물질 목록만이라도 달라고 했지만, 이 역시 거부했다. 1년 가까이 흘러 2008년 12월 29일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 ‘반도체 제조공정 근로자 건강실태 역학조사 결과 발표회’를 열었다. 환자와 (유)가족들은 또 한 번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 고 박지연씨.
백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김옥이 씨는 의사들 앞에서 이렇게 절규했다. “(산재) 불승인은 저에게, 지연 씨(박지연 씨는 지난 3월 31일 스물셋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에게 죽으라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사형선고 받으러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습니다. 이 심정 짐작이나 하시겠습니까?”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이 백혈병으로 숨지고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엄연히 존재하는데, 원인 규명을 위한 노력은커녕 정부도 삼성도 그 누구도 이들의 죽음과 고통에 책임지지 않겠다 한다. 앞서 고(故) 황유미 씨의 사연에서 확인한 것처럼, 더 큰 문제는 회사 측의 대응방식이었다. 금전적 보상을 미끼로 사직을 종용하고, 병원비 조로 돈을 건네면서도 회사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직원들이 모금한 것이라고 둘러대는가 하면, 산재처리는 알아서 하라는 식의 무책임하고 비인간적인 태도로 (유)가족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겼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삼성이라는 공룡을 상대로 승산 없는 싸움을 하는 동안, 치료비와 생활비 등을 모두 피해자들이 부담해야 하는 상황은 백혈병 환자와 가족들을 두 번 울리고 있다. 내 가족이 똑같은 일을 당한다면 그때도 이런 현실을 그냥 모른 척 할 수 있을까?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에게는 건강할 권리도, 최소한의 인권도 과분한 사치란 말인가. 방송, 신문 할 것 없이 주류언론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 받아온 삼성 반도체 백혈병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해 씌어진 이 책은 “경영권을 편법으로 세습하고 무노조 경영을 이어가도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권력, 세계 초일류 글로벌 기업 ‘삼성’의 숨은 실체에 관한 보고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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