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인데도 정치권력 이행의 속도는 무척 빠르다. 신자유주의 정권의 탄생과 함께 한층 필 받은 <동아일보>가 속속 새 소식을 내놓는다. 인수위원장 자리에 이경숙씨가 유력하다고 보도한다. 대통령 당선자가 일부 주변의 반대 “의견을 받아들여 장고했으나 이 총장으로 최종 낙점했다는 후문이다”라고 했다.

<MBC> 뉴스데스크도 “이경숙 총장을 사실상 낙점한 가운데” “이 당선자가 막판에 다른 후보로 선회할 가능성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라고 했다. ‘5공 전력’ 시비 때문이라고 했다. <뷰스앤뉴스>는 좀더 구체적으로, “소장파 측근들은 이 당선자가 향후 한나라당에서 수구부패 이미지를 탈색시키려 할 경우 이 총장 기용이 수구진영의 반발 명분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강한 우려를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고 설명한다.

▲ 동아일보 12월25일자 1면.
기본적인 문제의식 찾아보기 힘든 이경숙 인수위장 보도

이 몇 가지 짧은 기사로서는 논란의 진상을 정확히 알기 어렵다. 더욱이나 전두환 시절을 체험하지 못한 네티즌의 세대의 경우에야 오죽하랴?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본다. 다행히도 <신동아> 황우택 기자가 2006년 4월 초 이경숙 총장을 길게 인터뷰했다.

기사에 따르면, “이 총장은 1980년 신군부가 국회를 해산하고 입법부를 대신하는 입법회의를 만들었을 때 입법의원”으로 참가했다. 입법회의라는 게 다름 아닌 쿠데타 세력의 수장인 전두환과 그가 이끈 탈법적 국보위에 의해 만들어진 어용기관이라는 사실은 빠트린다.

아무튼 이 총장은 1981년 당시 민주정의당 전국구 의원이 된다. 총장님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구색을 갖추기 위해 숙대와 이대에서 한 명씩 정치학박사를 데려간 거죠. 이대에선 김행자 교수였어요. 두 학교 동문회에서 추천해 달라고 요청이 왔는데 여자 정치학박사가 뻔하니까 추천된 거죠.”

처음에는 거절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때는 국가비상 시기였고 끝까지 사양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결국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의원활동을 했고, “외교통일 정책을 다루면서 전공분야의 실무를 배우는 소중한 경험을 쌓았”다고 말했다. “국회의원 한 덕으로 만났던 정계, 재계, 관계 인맥이 해묵은 난제를 해결하는 데 크게 되움이 됐”다, “국회의원 경험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감회를 털어놓았다.

<신동아>가 사이비 잡지가 아니고, 또한 여기 실린 이 총장의 답변이 실언이 아니라면, 꽤나 논란이 될 대목이 없지 않다. 마지막 국회의원 경험을 감사하게 여기고 있다는 부분이 특히 그렇다. 권력과 가깝게 지내는 게 유리한 현역 사립대학 총장의 입장에서 한 발언이라고 하더라도, 당시의 선택을 부끄러워하거나 당시의 행동을 사과하는 내용은 인터뷰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상황 논리의 불가피함을 내세울 따름이다.

정치칼럼니스트 유창선이 발끈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는 이경숙 총장이 지닌 학자적, 경영자적 강점을 분명히 인정한다. 그렇지만 “손에 피를 묻히고 권자에 오른 전두환 세력의 강압통치를 정당화하고 힘을 보태는데 가담했던 행위의 무게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못 박는다. “본인이 과거 전력에 대해 잘못이라고 생각조차하지 않는 상태에서, 우리는 국보위 출신 인수위원장의 등장을 환영해야 하는 것일까”라고 묻는다. 맞다. 양식 있는 저널리스트고 양심 바른 저널리즘이라면 최소한 이런 질문 정도는 던져야 한다.

그래서 시청자, 독자들이 권력의 선택에 대해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판적으로 판단토록 해야 한다. 그게 민주정치가 운영되는 꼴이고, 그래야 민주주의가 제대로 돌아간다. 당선자측이 후보 리스트를 신문․방송에 흘린 것도 여론을 청취하고자 하는 뜻이었을 게다. 소위 ‘애드벌룬’을 띄워보는 것이다.

▲ 한겨레 12월25일자 4면.
<한겨레>는 이런 최소한의 임무를 다한다. 이 총장의 “1980년 신군부 정권 정통성 부여 작업” 경력을 논란으로 제기한다. 국보위 경력에 대한 당선자 측근의 부담을 옮기면서, ‘의외 변수 돌출’에 당선자도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고 전한다. <경향신문>도 비슷하게 ‘인수위원장 후보 이경숙씨 국보위 입법위원 전력 논란’을 제목으로 단다. 이에 반해 수구신문들은 이 총장의 이력에 관해 아예 언급을 하지 않는다. 이들 일간지만 읽는다면, 논란이 있었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이런 와중에 <매일경제>는 ‘이경숙 인수위원장에게 거는 기대’라는 사설을 잽싸게 내건다. 딸랑딸랑~

“어이 KBS, 정신 좀 차리지… 대체 어쩔 셈인가”

▲ 12월24일 KBS <뉴스9>
욕해봐야 입만, 아니 손가락만 아픈 짓이다. 가르쳐준다고 배우지 않을 것이다. 기본이 비틀어져 있는데, 대체 뭘 바라겠는가? 그러나 <KBS>의 행태는 도무지 묵과할 수 없다. 이경숙 총장이 유력함을 알리면서, 9시뉴스는 “11대 국회의원, 남북적십자회담 자문위원 등 다채로운 경력에 사상 첫 여성 인수위원장이라는 상징성도 고려됐다는 후문”을 읊는다.

‘11대 국회위원’의 추상성으로 국보위 입법위원, 민정당 전국구위원의 구체성을 덮어버린다. 논쟁을 회피하고, 논란을 은폐한다. 기찬 서비스다. “11대 민정당 전국구 위원을 지낸 것을 놓고 정치경험이 있다는 평가와 새 인물이란 기준에 맞지 않다는 지적이 엇갈리고 있”다고 한 <SBS>보다 더 신묘한 재주다. 어찌 딱 한번의 기사를 갖고 그러냐고 원망할지 모르지만, 하나만 봐도 전부를 읽어낼 수 있는 법이다. 기회주의 변신의 욕망쯤은. KBS의 선택이 걱정된다. 대체 어쩔 셈인지. 좀 정신 차려야 하지 않겠나, 이 친구야! 집단망각 속에 인수위원장은 선임되고, 미래는 그래서 더욱 불투명하고 갑갑해지고.

지금처럼 ‘비평의 무기’를 예리하게 연마하고 정확하게 사용해야 할 때가 있을까? 벼락같은 이성의 도끼질, 결을 거스른 감수성의 대패질에 열중하지 않을 수 없다. ‘래디컬’한 저널리스트로의 변신. 자본권력과 국가권력, 매체권력, 지식권력이 나의 상대다. 가끔 참패당하고 때로는 붙잡고 버티지만, 그래도 결정적인 왼손펀치 한방을 가진 선수로 남고 싶다. 인민은 착하고 또 무섭다. 이들과 함께하는 비평 말고 그 어떤 것이 후기근대, 후기자본의 불모지대를 넘어갈 수 있겠나? 목청 낮춘 채 예의주시하는 보통사람들의 삶, 이들의 언어에 스며들어 비평의 유격전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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