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제자리로 돌아온 <MBC 스페셜>은 세월호 4주기를 맞이하여 두 편의 특집을 마련하였다. 그중 하나가 지난 16일 방영한, 끝나지 않은 세월호 학부모들의 이야기 ‘너를 보내고 - 416 합창단의 노래’ 편이었다. 그리고 4월 23일, 아직 끝나지 않은 세월호 현장의 이야기를 또 한 편 다룬다. 바로 그 바다의 목숨을 건 목격자였던 세월호 잠수사들의 이야기, ‘로그북 세월호 잠수사들의 일기’이다.
시간이 어찌 흘러가는지 밥을 먹어야 하는 건지 아니 먹어도 되는 건지
잠을 자도 되는 건지 모를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무조건 시신을, 아니 생사를 확인해야 했다. - 잠수사 일기 중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사람들이 건물을 빠져나오기 위해 서둘러 아래로 내려가는 가운데 거슬러 건물을 올라가는 소방관의 모습이 담긴. 지난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WTC) 건물에 비행기로 추정되는 두 대의 검은 물체가 곧장 날아와 부딪쳤다. 건물은 연달아 폭발했고 무너져 내렸다. 이 사건으로 납치된 비행기 승객과 건물에 있던 사람들 등 3500여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가운데에는 구조 활동 중에 순직한 343명의 소방관과 23명의 경찰이 있었다. 건물이 붕괴된다는 무전조차 제대로 받지 못해 소방관들의 피해는 더욱 커졌다고 한다.
하지만 국가재난 사고에서 발 빠르게 움직인 공권력으로 인해 미국 국민들은 '국가는 위기에서 절대 국민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확인했다.
70일간의 로그북, 헌신의 시간
MBC 스페셜 ‘로그북 세월호 잠수사들의 일기’ 편
재난의 현장에 제일 먼저 간 미국의 '공권력'. 우리는 어땠을까? 4년 전 그날 바다에서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뛰어든 이들은 민간 잠수사들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불성설'이다. 국가 재난의 상황에 무기력했거나 진실을 은폐하는 데 몰두한 공권력. 희생자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던 민간인들은, '세월호'를 통해 국민들이 던진 질문 '이게 국가냐'라는 걸 현장에서 증명해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 증명의 기록은 지난 4년의 시간 동안 희미해졌다. 그들은 '논란'의 주인공이 되어 조용히 사라졌다.
<MBC 스페셜>은 그 사라진 기억을, 하지만 끝나지 않은 기억의 봉인을 푼다. 잠수사들이 잠수를 하고 나서 남긴 잠수일지, 일명 로그북. 잠수했던 날짜, 장소, 시간, 입수지점, 수심, 기온, 특기 사항 등을 적은 이 기록들. 하지만 잠수사들은 차마 그 기록을 공개할 수 없었다고 한다. 다큐는 70여 일간 기록된 잠수사들의 로그북을 기초로 하여 세월호 현장, 가장 처절한 목격자였던 잠수사들의 이야기를 복원한다.
다섯 구의 시신을 인도하고 올라오니 감독관 “사람이 더 있드나”
“더 확인해봐야 알겠습니다.”
“수고했고 실종자 가족이 물속에 상황을 듣고 싶어 하니 가서 얘기해줘라.”
저 편에 열 명쯤 되어 보이는 실종자 가족이 보인다.
그들에게 다가간다.
그들의 충혈 된 애타는 눈빛을 보니 내 눈시울도 젖어온다.
어찌 얘기를 해야 될는지. - 잠수사의 일기 중
2014년 4월 세월호 전원 구조가 오보라는 소식을 듣고 전광근 씨는 장비를 챙겨 참사 현장으로 달려갔다. 이미 천안함 인양에 참가했던 경험이 있던 그는 현장에서의 잠수가 용이치 않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 아이들의 아버지 황병주 씨, 해병대 출신의 한재명 씨, 대학 때부터 취미로 다이빙을 배운 백인탁 씨 등 그저 자신의 '잠수 경험'이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만으로 다수의 잠수사들이 현장으로 달려갔다.
MBC 스페셜 ‘로그북 세월호 잠수사들의 일기’ 편
하지만 현장은 '구조'라고 말하기도 무색하게 체계도, 장비도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많은 잠수사들이 의욕만 가진 채 서성이다 발길을 돌렸다. 사고초기 잠수를 할 수 있었던 잠수사는 10명 정도 밖에 될 수 없었다. 그리고 민간 잠수사들이 중심이 되어 유족들과 함께 수색 작업체계를 만들며 수색에 돌입한다.
잠수라는 작업은 생명이 위협받는 위태로운 과정이다. 그래서 산업현장 등에서 잠수사들은 하루 한 번 잠수를 한다. 잠수를 하는 과정도 서서히 수압을 조절하며 내려갔다 조심스레 올라와 감압 탱크에 재빠르게 들어가야 하는 섬세한 과정이다. 그렇지 않으면 '잠수병'에 걸려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오늘 수습한 희생자의 얼굴과 눈동자, 차디찬 하얀 손과 발들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환영으로 비추어진다. " - 2014. 04. 26 잠수사 로그북 중
하지만 세월호 현장에서는 이 '원칙'을 지킬 수가 없었다. 참혹하게 뒤엉켜 있는 희생자들, 그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유족들. 그 현장의 목격자가 된 잠수부들은 하루 한 번이라는 원칙이 무색하게 4번까지의 잠수를 감행했고, 수색이 어려운 세월호에서 하나의 시신이라도 더 올려오기 위해 보조장치도 포기한 채 무리한 잠수를 감행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잠수부들의 열의와 헌신에 대해 세상의 평가는 냉정했다. 초기와 달리 점차 성과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 현장에 불만이 터져 나왔고, 잠수부들의 헌신을 '돈'으로 비아냥거리는 시선마저 등장했다. 장기화된 수색,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료 잠수부가 사고로 목숨을 잃고, 7월 10일 미수습자 11명을 남겨놓은 가운데 해경은 잠수부와 한 마디 의논도 없이 이들의 철수를 결정했다.
여전히 그 바다에 잠겨있는 잠수부들
MBC 스페셜 ‘로그북 세월호 잠수사들의 일기’ 편
그렇게 세월호 수색에 참가했던 민간 잠수부들은 '불명예'스럽게 세월호 현장에서 나왔다. 하지만 4년이 지난 지금, 유족들만이 아니라 그들 역시 여전히 그 '바다'에 있다. 차마 부모들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세월호 현장. 그 현장에서 오로지 한 명의 시신이라도 더 가족 품으로 보내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로 뛰어들었던 잠수부들. 하지만 그 무리했던 여정이 그 이후 그들에게 고스란히 고통으로 돌아왔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잠수사 일기 중
눈만 감으면 다시 ‘그 바다’에 있다고 했다. 차라리 눈앞에 아이들이 보이면 괜찮다고 했다. 처음엔 아이들의 형체로, 그 다음에 시신의 ‘냄새’로 더듬어 수색을 했어야 했던 그 경험은, 이제 그들에게 암흑 속 막연한 공포의 기억으로 남았다. 불안장애, 우울증, 수면장애, 심지어 자살 충동에 시달리며 '세월호 이전의 나'를 잃어갔다. 누군가는 잠수사 일을 그만두었고, 늘상 화를 내는 등 성격이 변해 가족들을 걱정시킨다. 무리한 잠수로 신장병이 악화되어 투석을 하게 되었고, 세상의 차가운 시선에 '한국이 싫어' 외국을 전전하기도 한다. 결국 잠수사들 중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들을 만난 정혜신 박사는 이들이 겪는 고통을 '죽음 각인'이라는 병명으로 답한다. 죽음이 일상화된 현장 속에 놓여졌던 이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그 경계 너머로 자신을 이끌게 된다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를 만나 그 말에 비로소 눈물을 터트리는 이들, 그들의 '트라우마'는 깊었다. 그리고 다큐가 말하고자 하는 건, 바로 국가재난 사태에 의인으로 참가한 이들에 대한 ‘국가의 부채’이다.
MBC 스페셜 ‘로그북 세월호 잠수사들의 일기’ 편
9.11 테러로 순직한 소방관들은 'FDNY 343 NEVER FORGET'이란 문구로 새겨져 기억된다. 2005년부터는 소방관을 비롯한 일반인들이 이들이 올라갔던 쌍둥이 빌딩과 같은 110층 높이의 계단을 오르는 행사를 하며 '추모'의 정신을 이어간다. 우리는 어떨까? 그날, 그 바다에서 '국가'의 역할을 대신했던 민간 잠수사들. 민주당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민간 잠수사들을 '세월호 희생자 특별법'의 대상자에 포함시킨다는 내용의 법 개정안을 국회에 발의했다. 하지만 한국당 의원들의 반대로 아직도 국회 계류 중이다.
세월호 4주기, 국가의 재난 현장에 달려갔던 잠수사는 말한다. 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아마도 그곳에 가지 않을 거라고. 국가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놓은 이들 민간 잠수사들에게 '국가'가 답해야 할 차례라고 다큐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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