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각(奎章閣).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창덕궁 금원 북쪽에 세운 왕실 학문 연구기관이자 왕실 도서관. 규장(奎章)이란 역대 왕의 시문(詩文)이나 글을 가리키는 바, 규장각은 조선 역대 임금들이 남긴 글과 책을 수집해 보관하는 명실상부 조선 왕실 직속 국립도서관이었다. 1782년 강화도에 규장각의 외각, 즉 외규장각(外奎章閣)이 세워지면서 규장각에 보관돼 있던 서적은 내규장각과 외규장각 두 곳에 나뉘어 보관되는데, 1866년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이 한때 1042종 6130책에 이르는 방대한 서가를 자랑했던 외규장각에서 345권을 빼돌리고 나머지는 건물과 함께 불태웠다. 이후 한 세기가 넘도록 행방이 묘연했던 외규장각 도서가 1975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된 사실이 확인되면서 반환을 둘러싼 논란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남아 있는 외규장각 도서는 191종 297권. 1993년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이 한국 방문 때 우리 정부에 돌려준 한 권은 고속철도 차량 사업권을 프랑스 TGV가 따내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고, 이후 한국과 프랑스 정부는 길고 지루한 협상 끝에 ‘반환’이 아닌 ‘영구 임대’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 외규장각 도서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대체적인 역사적 사실이다. ‘영구 임대’란 외규장각 도서에 대한 프랑스의 소유권을 ‘영구 인정’한다는 뜻이므로, 한국 정부가 ‘소유권’까지를 돌려받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영구 임대’에 따른 ‘점유권’만을 협상을 통해 받아들이겠다는 현실론. 다시 말하면 공식적인 ‘반환’을 포기하면서 실질적으로 ‘반환’의 모양새를 취하겠다는 ‘타협’의 산물이다. 두 나라 정부가 이런 내용으로 사실상 더는 달라질 것 없는 합의를 이뤘는데도 이 중대한 사안이 별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안타깝기만 하다. 내용인즉슨 외규장각 도서 297권을 영구대여 형식으로 가져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하고, 계약은 3~4년마다 갱신한다. 대신, 프랑스 정부가 요구해온 이른바 ‘등가등량’(等價等量) 원칙을 받아들여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는 국보급 유물을 프랑스에 볼모로 보낸다. 더 황당한 것은 우리가 보낼 국보급 유물이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 같은 대표성 있는 곳이 아닌 파리 외곽의 소규모 박물관에 ‘초라하게’ 전시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프랑스도 이미 약탈 사실을 인정한 바 있는 우리 문화재를 왜 빌려와야 하는지, 프랑스가 그동안 줄기차게 요구해온 ‘등가등량’ 원칙이 지난 2001년에 이미 국내 여론 반발로 무산된 바 있는데도 우리 정부가 왜 굳이 그걸 수용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민간 차원의 항소심이 아직도 진행되고 있고, 심지어 지난 4월에는 국제사회가 약탈 문화재 반환에 공조하기로 합의까지 한 터라 우리 정부의 굴욕적인 협상 내용은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현실론’에 입각해 예의 이런저런 부실한 논리들이 동원된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둬야 할 것은 우리보다 더 열악한 조건 아래서 에티오피아는 영국에서, 솔로몬은 뉴질랜드에서, 콩고(자이르)는 벨기에로부터 자신들이 억울하게 빼앗겼던 ‘빛나는 역사’를 당당하게 돌려받았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이것이 입만 뻥긋 하면 반만 년 역사가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이 정부의 한심한 외교․문화 수준이다. 필리핀군의 한국전쟁 파병을 보는 필리핀 내부의 시각을 갈무리한 전 <마닐라 타임스> 기자 미리테스 시손은 필리핀 민족영웅 호세 리살이 100년도 더 전에 했다는 다음의 경고를 되새겨준다. “과거 보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저주스런 역사가 되풀이될 것이다.” 어디 우리 뿐인가. 앙코르와트를 비롯해 캄보디아의 빛나는 고대유적과 문화는 치유할 수 없는 만큼 파괴돼 버렸고, 아직도 전 세계 곳곳에 널린 고미술품 경매 시장에서는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의 귀중한 유산들이 홈쇼핑 상품마냥 버젓이 사고 팔린다. 흉포한 날강도들은 되돌려달라는 해당국가의 요구에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그 기나긴 식민지배 기간 동안 도대체 얼마나 많은 문화재가 약탈되고 불살라지고 훼손된 것일까? 왜 아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가?

▲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 (아시아네트워크, 2003)
문화재 약탈은 아시아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짊어진 여러 가지 문제들을 이해하는 하나의 좋은 본보기다. 어디 빼앗긴 것이 눈에 보이는 유물뿐이겠는가. 서구 열강이 생산하는 세계관에 갇혀 정작 우리의 문화, 우리의 시각, 우리의 세계관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 그 정신의 복속과 퇴행이 정작 우리에게는 더 큰 문제인 것을. 알자지라를 비롯한 아랍 언론의 활약이 부각되기 전까지 이라크 전쟁을 바라보는 준거 틀이란 것이 고작 미국 언론이 생산하고 배포하는 미국식 패러다임이었다는 사실은 이제 새삼스럽지도 않다. ‘큰 일’이 터지면 한국의 언론은 CNN을 동시통역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언론이 생산해낸 기사를 베껴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른 시각,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 여지가 없으면 한 가지 논리에 경도되는 것은 당연한 일. 아시아의 문제를 아시아의 시각으로 바라본 기억이 있는가? 그토록 가까운 이웃의 문제를 우리는 너무도 오랫동안 외면해오지 않았던가? 이 책은 그런 물음에 대한 대답의 결과로 탄생했다. 그래서 한국의 5월만큼이나 뜨거웠던 랭군과 자카르타와 방콕과 마닐라의 5월 정신은 무엇인지, 한국전쟁에 전투병과 의료단을 보낸 아시아 각국에게 개전 60주년을 맞은 지금 한국전쟁은 기실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문화재 약탈이라는 서방 세계의 조직범죄 앞에서 망각의 늪을 헤매온 아시아는 지금 도둑맞은 정신, 빼앗긴 역사를 되찾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묻는다.

책 제목처럼 우리가 속한 아시아에 대해 우리는 몰라도 너무 모른다. 버마 반정부 민주화 투쟁의 영웅 닥터 나잉옹은 1998년 아태평화재단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고 얻은 소회를 이렇게 적었다. “이토록 강력한 시민사회 기반 위에 있는 한국 시민들이 어떻게 국제문제와 국제연대에 이렇게 무관심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이 책은 그 지독하리만치 뿌리 깊은 무관심의 반성이자, 아시아를 진정어린 마음으로 이해해보려는 작은 출발점이다. 나중에 <전선기자 정문태>에 실린 정문태의 보석 같은 글 ‘킬링필드의 전설을 끊는다’를 비롯해 이른바 아시아네트워크를 결성한 아시아 각국 언론인과 민주화운동가들의 글은 지금까지 그저 피상적으로만 알아왔던, 우리가 그토록 몰랐던 아시아의 속살을 아시아인의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서구 중심주의를 벗어날 수 없는 주변부로 남아 있던 아시아에서 아시아의 시각으로 이 세계를 이해하는 일은 아무리 그 중요성을 강조해도 모자랄 듯하다. 가깝고도 먼 이웃에 대한 지독한 무관심과 망각 속에서 우리는 어느새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어 왔기 때문이다. 아시아를 이해하는 일의 의미와 가치는 바로 이 지점에서 확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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