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케이스에서 가수가 의상을 정비하고 마이크 세팅을 하는 동안, 무대에선 가수가 없는 빈 공간을 방치하지 않고 신곡 뮤직비디오를 상영한다. 9일 트와이스가 무대를 비운 가운데 MV가 상영되는 동안 필자에게 특이한 일이 벌어졌다. MV 안에 다양한 패러디가 등장하는데, 과연 이게 무슨 영화의 어떤 장면이었나를 떠올리느라 ‘즐기는’ MV 감상이 아니라 ‘분석’하는 MV 감상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MV가 끝나고 어떤 영화가 어떻게 패러디되었나를 체크해보니 <라라랜드>를 제외하고 레퍼런스된 영화들이 죄다 1980-90년대에 만들어진 영화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21세기 영화가 단 한 편만 패러디되었으니, 90년대 이후 출생한 트와이스 팬은 유튜브나 기사를 참고하지 않으면 이 장면이 무슨 영화였는지 감이 오지 않을 공산이 크다.

트와이스의 ‘왓 이즈 러브?'(What is Love?) MV 갈무리(=JYP엔터테인먼트 제공)

심지어 일본 SNS 반응을 보면 <러브레터>가 자국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지효가 등장하는 패러디에서 무슨 영화를 패러디했는지조차 모르는 유저 반응도 있을 정도였다.

모르는 게 당연하다. 만일 필자에게 누군가가 <말타의 매>나 <바람 불어 좋은 날>을 패러디해서 보여주면 무슨 영화의 패러디인지조차 감을 못 잡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러브레터>는 1995년에 만들어진 영화라 현재 학생이거나 대학생 세대라면 일본인이라 해도 감을 못 잡는 게 당연할 수 있다.

트와이스의 신보 ‘What is Love?’ MV에서 레퍼런스로 만들어진 패러디 소재 영화들의 많은 경우가 80-90년대 문화의 산물이라는 점은, 가요와는 엄연히 다른 장르인 스필버그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도 똑같이 보인다.

<레디 플레이어 원>을 언론시사에서 보면서 영화를 감상하기보다 어느 장면에서 이런 레퍼런스가 나왔는가를 분석하는 게 바쁠 정도로 찾다가 140분이 훌쩍 지나갔다.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 스틸이미지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레디 플레이어 원>이 끝나고 이 영화가 어느 레퍼런스를 어느 장면에서 활용했나를 분석한 메모장을 보니 정말 기상천외한 장르에서 언급되었음을 알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백 투 더 퓨처>의 드로리안을 찾는 건 시작에 불과했다.

공포영화 <샤이닝> 및 아이언 자이언트, <사탄의 인형> 속 처키 및 킹콩, <쥬라기 공원>의 T렉스, <토요일 밤의 열기>와 <터미네이터2: 심판의 날>의 ‘엄지 척 시퀀스’, 기동전사 건담과 메카고지라 등 대부분의 레퍼런스는 21세기의 산물이 아니다.

애니메이션 <아키라> 속 바이크, 고어 게임 <모탈 컴뱃> 속 네 팔이 달린 캐릭터 고로, <스트리트 파이터2>와 <마인 크래프트>, 마이클 잭슨은 물론이고 듀란듀란과 A-HA의 ‘Take on Me' 등 영화 이외의 엄청나고도 다양한 레퍼런스도 21세기가 아니라 지난 세기의 산물이다.

단지 영화만 꿰고 있다고 영화 속 20세기 레퍼런스를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애니메이션과 게임, 해외 팝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반적인 기본 지식이 있어야 숨겨진 다양한 레퍼런스를 찾을 수 있고, 이해 가능하다.

이 점에 있어 <레디 플레이어 원>은 아이러니한 영화다. 분명 이 영화를 관람하는 연령층은 이 영화의 레퍼런스를 찾기 쉬운 중장년층이 아니라 10대에서 20대 관객이 많을 텐데도, 30대 이하의 관객은 결코 찾기 쉽지 않은 레퍼런스로 가득하다는 아이러니 말이다.

트와이스의 ‘왓 이즈 러브?'(What is Love?) MV 갈무리(=JYP엔터테인먼트 제공)

이스터 에그 같이 도처에 숨은 갖가지 레퍼런스를 찾을 만한 연령대의 관객에게 이전 세대의 레퍼런스를 찾으라고 속삭이는 스티븐 스필버그나, 20세기 영화의 명장면을 패러디로 연출한 ‘What is Love?’ MV는 분명 영화와 MV를 즐기는 관객의 연령대와 레퍼런스의 시대적 배경이 상당한 간격이 크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 시대적 간격이 얼마나 상당한가 하면 그 패러디가 “오겡끼 데스까”를 외치는 일본영화라 해도 자국 영화의 장면이라는 점 자체를 모르는 젊은 일본 MV 시청자가 있을 정도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번 트와이스의 신보 MV의 연출자와 스티븐 스필버그는 왜 관객의 연령대와 괴리감이 큰 1980-90년대라는 레퍼런스를 잔뜩 갖다 놓은 것일까. 그건 그만큼 현 세기의 문화적 산물보다 20세기의 문화적 유산이 더욱 매력적이라는 방증이다.

‘천만 영화’라는 개념은 20세기 당시에는 생소한 개념이다. 21세기 들어서나 새로 생긴 문화적 개념이다. 한데 그 많은 천만 영화 가운데서 레퍼런스를 따온다고 가정해보자. 천만 관객이 든 영화들 가운데서 관객의 뇌리를 사로잡은 명장면을 손꼽으라고 한다면 쉽게 손꼽기 어려워진다.

하지만 세월을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천만 영화가 아님에도 <쉬리>에서 김윤진이 머리에 피를 흘리는 애절한 장면은 핑클 시절 옥주현이 MV에서 패러디할 정도로 유명한 시퀀스다. <박하사탕>에서 설경구가 기찻길에서 양 팔을 벌리고 있는 장면 등 레퍼런스로 언급될 만한 인상적인 장면이 꽤 된다.

영화 <플래툰> 포스터 (이언픽쳐스)

외국영화는 말할 것도 없다. <플래툰>에서 윌렘 대포가 양 팔을 벌리고 죽어가는 장면, <영웅본색>에서 선글라스를 낀 주윤발의 포스 등 문화적으로, 명장면으로 레퍼런스 될 만한 시퀀스는 상당하다.

디지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지만 정작 아날로그 시대에 풍미하던 지난 세기 대중문화의 정수를 담은 트와이스 ‘What is Love?’ MV와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 이 작품들은 10대와 20대 관객이 태어났거나 태어나지도 않았을 당시 만들어진 잘 빠진 대중문화의 정수를 만끽하고 즐겁게 찾아보라는 달콤한 유혹이다. 문화적인 경험을 공유하지 못한 21세기의 젊은이들이 20세기 대중문화의 정수에 대해 동경하기는 힘들겠지만, 보고 즐기라는 유혹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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