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5년 가상현실 게임이 인간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설정으로 시작된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2018). 주인공 웨이드(타이 쉐리던 분)는 현실에서는 루저에 가깝지만, 게임 세상 속에서는 능력자 ‘파시발’로 통한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빈민촌에 거주하는 이모네 집에 얹혀사는 웨이드의 유일한 꿈은 위대한 가상현실 게임 개발자 할리데이(마크 라이런스 분)가 설계한 ‘오아시스 이스터에그 사냥’ 게임에서 우승하여 막대한 부를 거머쥐는 것이다.

최근 <더 포스트>(2017)를 통해 녹슬지 않는 연출력과 감각을 보여준 스티븐 스필버그의 새로운 도전은 놀랍게도 가상현실을 주제로 한 SF 블록버스터이다. 최근 <링컨>(2012), <스파이 브릿지>(2015), <더 포스트> 등 다소 무게감 있고 진지한 영화 연출을 도맡아 했지만, 사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장기는 <죠스>(1975), <이티>(1982),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쥬라기 공원>(1993)으로 대표되는 어드벤처 블록버스터 영화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앞서 언급한 영화들 외에도 <빽 투 더 퓨처>, <맨 인 블랙>, <트랜스포머> 시리즈를 기획하고, 그 외 수백편의 영화 제작에 관여한 스필버그의 장기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영화다.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 스틸 이미지

<레디 플레이어 원>은 지난 20세기 대중문화의 한 축을 담당했던 수많은 레퍼런스가 등장하는데, 그중에서도 고 스탠리 큐브릭의 걸작 <샤이닝>(1980)을 오마주한 시퀀스가 눈에 띈다. 사실, 20세기 대중문화의 레퍼런스로 가득한 <레드 플레이어 원>을 아주 새롭거나 획기적인 영화로 보기는 어렵다. 루저에 가까운 주인공이 뜻하지 않은 위기와 시련 속에서 조력자들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며 원하는 바를 쟁취한다는 스토리는 그동안 숱한 어드벤처, 모험기에서 줄기차게 보았던 이야기이다.

허나, 때로는 단순하고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는 고전이 좋을 때도 있다. <레드 플레이어 원>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스토리라인 위에 현대인이 사랑했던 다양한 대중문화 아이콘을 촘촘히 박아, 새로운 변주를 시도한다.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 스틸 이미지

가상현실에서 어울리는 동료 캐릭터 H가 있긴 하지만 혼자 움직이기 좋아하는 웨이드는, 일본 만화 <아키라> 속 가네다의 바이크를 즐겨 타는 아르테미스를 만나면서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요즘 유저 간 협력을 강조하는 게임이 증가하고는 있지만, 게임 속의 나는 철저히 혼자 움직이는 외로운 존재다. 늘 혼자서 지내기 좋아하고, 아무도 모르는 구석진 공간에서 홀로 게임만 하던 웨이드는 현실에서 놀란 소렌토(벤 멘델슨 분)가 이끄는 IOI 독점 체제에 저항하는 사만다(아르테미스)를 통해 세상에 눈을 뜨고 동료들과 함께 잘못된 세상을 바꾸기 위한 협업을 시도한다.

극중 가상현실 게임의 중흥기를 열었던 할리데이는 한 사람만이 부와 명예, 모든 것을 독차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때 그의 밑에서 일하다가 어느덧 IOI 대표가 된 놀란은 달랐다. 자신이 가진 막대한 자본과 힘으로 오아시스 세계를 통제하려 드는 놀란은 홀로 부와 권력을 거머쥐고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온갖 나쁜 짓도 서슴지 않고 벌인다. 그러나 웨이드는 달랐다. 웨이드 역시 사만다를 만나기 전에는 게임에서 우승하면 그 혼자 모든 것을 가질 요량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슈퍼히어로와 같은 완벽한 존재는 아니지만, 대중문화의 코드를 읽어내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웨이든은 적어도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고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 스틸 이미지

웨이든 외에도 그를 도와 함께 놀란에게 맞서는 동료 캐릭터도 인상적이다. 빈민촌 출신 백인 남성으로 설정된 웨이든과 훗날 한 팀을 이루는 동료들은 여성, 흑인, 아시아계 이민자 등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이다. 미국 주류 세계에서 차별받는 빈민, 여성, 흑인, 이민자들이 자본과 권력을 독식하는 주류 체제에 맞서 승리한다는 이야기는 현실에 대한 통쾌한 대리만족을 안겨준다.

하지만 <레디 플레이어 원>은 사회적 약자들로 구성된 새로운 세력이 구세력을 몰아내는 것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자본과 권력을 독식하려고 했던 기성세대의 그릇된 가치관을 반면교사로 삼아 사회 구성원이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그동안 하위문화로만 인식되어온 서브컬처와 여성, 빈민, 이민자의 연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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