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아시아를 대표하는 다큐멘터리 감독 하라 카즈오의 기념비적인 작품 <천황군대는 진군한다>(1987)는 일본 사회에서 논쟁적 인물 중 하나인 오쿠자키 겐조의 행보를 다룬다. 영화 초반, 자신이 중신을 서준 지인의 결혼식에서 과거 부동산중개업자를 살해하고, 히로히토 일왕에게 돌을 던지고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를 죽일 뻔했던 이력을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오쿠자키 겐조는 이 영화가 결코 평범하게 흘러가지 않을 것을 암시한다.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 부대원 중에 혼자 살아남은 오쿠자키 겐조는 자신과 함께 전쟁터에 나간 군인들을 굶주려 죽게 방치한 일왕과 지배층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다. 전쟁 이후 아나키스트가 되어 태평양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데 앞장서는 오쿠자키는 전쟁 직후 두 젊은 병사가 상관들에 의해 억울하게 처형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당시 책임자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묻기 위해 희생자들의 가족을 대동하고 가해자들을 찾아 나선다.

<천황군대는 진군한다> 스틸 이미지

“결과가 좋으면 폭력은 정당화된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오쿠자키 겐조는 그 존재만으로도 위협을 느끼게 한다. 실제로 오쿠자키는 전쟁 이후 부대원들을 처형한 상관들을 문책하는 과정에서 가해자들이 사건의 진상을 알리기 거부할 때, 그들을 향해 주먹을 휘두른다. 그리고 오쿠자키가 직접 경찰에게 신고하며 자신이 행사한 폭력을 자랑스럽게 알린다.

<천황군대는 진군한다>가 세상에 공개 되었을 때, 당연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폭력을 정당화하는 오쿠자키 겐조의 행동에 거부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한 가해자이자 조선 식민지배 및 조선인 종군 위안부, 강제 징용에 대한 명백한 책임이 있음에도 회피하기 바쁜 일본의 태도에 지친 사람들은, 과격하긴 하지만 일왕과 국가의 책임을 명백하게 묻는 오쿠자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천황군대는 진군한다>가 공개되고 30년이 지난 후, 하라 카즈오는 일본의 고도성장기 당시 석면 공장에서 일하다가 피해를 입은 센난 지역 노동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 했던 8년 반 간의 이야기를 영상을 통해 기록했다. 오쿠자키의 과격한 아니키즘 행보와 닮아 있던 하라 카즈오의 영화는 세월 탓인지 아니면 현재진행형인 석면 피해자들을 다룬 소재 때문인지 한결 차분해졌지만, 국가가 방치해서 벌어진 재난의 책임을 규명하는 특유의 날카로운 문제의식은 그대로였다.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 스틸 이미지

지난해 열린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비프 메세나상을 수상한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2017)은 215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자랑한다. 3시간 35분이라는, 관객들 입장에서는 다소 견디기 힘든 긴 시간도 기꺼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 영화가 2006년부터 2014년까지 벌어진 일들을 충실히 기록한 작품이라는 데 있다. 석면 피해의 책임을 회피하고자하는 국가를 상대로 8년 반 이상 지속된 싸움이었던 만큼 많은 일들이 있었고, 러닝타임의 문제로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에 들어가지 못한 에피소드도 상당할 것이다.

2005년 석면 건축자재를 제조하는 구보타 공장 노동자 79명이 사망한 ‘구보타 쇼크’로 촉발된 센난 지역 노동자 석면 피해 배상 소송은 원고 당사자들이 대부분 수십 년전 석면공장에서 근무한 고령자라는 점에 있어서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친다. 오래전 석면을 흡입한 피해자들이 그 후유증으로 인해 고통 받는 모습이 보여짐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끈질기게 피해자들을 외면했고 참다못한 피해자들은 거리로 나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 스틸 이미지

2006년부터 2014년까지 이어진 긴 소송 기간 십수 명의 피해자들이 고통을 호소하며 세상을 떠났다. 2014년 일본 대법원 판결을 통해 어렵게 승소를 거두었지만, 환경성 석면 노출, 기간 등의 이유로 배상에서 제외한 피해자들도 있다. 대법원 승소 판결 이후 그토록 바라던 국가의 사과를 받았지만, 온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 피해자들의 발걸음은 무겁다. 이들을 10년 가까이 바라본 하라 카즈오 감독은 일본 정부의 거듭되는 외면으로 상처 받고 분노하는 피해자들의 변화에 주목한다.

<천황군대는 진군한다>에서 시작된 ‘분노의 정당성’에 대한 하라 카즈오의 질문은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센난 지역 석면 피해 배상 소송을 주도했던 피해자 모임 대표는 자신들이 거둔 성과를 완벽하지 못한 승리로 평가하며, 국가를 향해 제대로 된 분노를 표출하지 못한 과정에 아쉬움을 토로한다. 국가가 주도하고 은폐한 사건에서 희생당한 피해자들은 분노를 ‘정당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 그 역시 지난날 국가가 저지른 과오를 마주하고 인정하는 국가의 태도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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