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수현 기자] 1월 24일, KBS 구성작가협의회 자유게시판에 ‘내가 겪은 쓰레기 같은 방송국, 피디들을 고발합니다’라는 글이 올라왔다. SBS와 뉴스타파 외주제작사에서 방송작가로 일하면서 겪은 일들을 폭로한 것이다. 해당 글은 화제를 불러왔고 수십개의 보도가 이어졌다. 비슷한 환경의 방송작가들의 폭로도 이어졌다.

인니의 제보와 관련된 기사(미디어스)

27일 미디어스는 인니 작가를 만났다. 조심스러운 만남이었다. 그는 ‘혹시’ 개인 신상이 유출될까 우려하는 마음에 실명을 밝히기도 곤란해 했다. KBS 구성작가협의회에 로그인 해 자신이 ‘인니’임을 확인시켜줬다. 그는 “SBS에서 내가 누군지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어쩔 수 없다”며 양해를 구했다.

인니는 “내 글로 무고한 작가들이 의심 받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며 “이번 논란이 나와 SBS의 대결구도로 가는 것 같아 당황스럽다. 제작 환경 전반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고 인터뷰 이유를 밝혔다. 후배 작가들에게 못난 선배가 되기 싫었다는 인니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KBS 구성작가협의회에 올라온 인니의 폭로 글(미디어스)

Q. 글이 큰 화제가 되었다
A. 그동안 방송작가 환경에 대해서 글을 쓴 사람은 많았다. 그런데 내 글이 이렇게 파장이 클 줄 몰랐다. 선정성 있는 글을 쓰고 싶지는 않았고, 많은 이야기를 생략했다.

Q. 너무 구체적인 폭로여서 불이익을 당할 우려가 있는 것 같다
A. 내가 누군지 찾으려면 찾을 수는 있을 거다. 만약 들키면 다른 일 하겠다는 마음으로 썼다. 막내작가들의 처우를 보고 참을 수 없었다.

Q. 위험을 감수하고 글을 올린 이유가 있는가?
A. 현재 서브작가여서 막내작가가 당하는 갑질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 안정기에 들어서기도 했고. 다만 못난 선배가 되고 싶지 않았다. 후배 작가들은 계속해서 부조리한 일에 시달릴 것이다. 조금이라도 알리고, 바꾸고 싶었다. 특별히 SBS만을 저격한 글은 아니었다.

<그것이 알고싶다> (SBS)

Q. 그래도 ‘<그것이 알고싶다>’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A. <그것이 알고싶다> PD들의 능력은 인정한다. 일은 정말 열심히 한다. 직업적으로는 완벽하다. 다만 막내작가를 향한 부당한 대우는 큰 문제다. 이건 변하지 않을 것 같다. 문제제기를 한 적 있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것이 알고싶다>는)말 잘 듣는 작가를 원한다. 똑똑하게 굴면 여기서 일 못한다. 그게 여기의 규정”이다. 그때 느꼈다. 변하지 않을 곳이라는 것을.

Q. 그럼에도 많은 작가들이 ‘<그것이 알고싶다>’를 가고 싶어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A. <그것이 알고싶다>는 몇 없는 시사 고발 프로그램이고 사회 정의를 잘 보여준다. 그래서 많은 막내작가가 <그것이 알고싶다>를 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주위에 가고 싶다는 후배가 있으면 무조건 말릴 것이다. <그것이 알고싶다> 출신이라는 경력이 중요한 건 이해한다. 하지만 그게 상식과 법 위에 설 수 없다. <그것이 알고싶다>에는 상식과 법이 없었다. 방송을 통해 큰 범주의 정의를 다루지만, 정의에는 범주가 없다. 내부에 있는 부당한 행위들도 인지했으면 한다.

Q. SBS 측의 입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A. PD와 SBS의 입장을 다룬 스포츠 조선의 기사를 봤다. 난 <그것이 알고싶다>에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그냥 사과 한 마디면 된다. 잘못을 인정했으면 좋겠는데 그러지 않았다.

Q. 막내작가를 향한 부당한 대우들, 어떤게 있는가
A. 구성작가협의회에 썼던 것처럼. 사소한 심부름, 거기서 오는 인격 모독이다. 근무 시간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임금 문제도 있다. 간단한 심부름이야 자발적으로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격적으로 전혀 존중해주지 않았다. 심부름이 너무 많아 본연의 업무가 힘들어지기도 했다. 조직 내부에선 그걸 당연하게 여긴다. 지킬 건 지켜줬으면 한다.

Q. 이런 문제들이 방송계 전반에 깔려 있는 것 같다
A. <그것이 알고싶다>만의 문제가 아니다. 방송계 전반의 문제다. 특히 정규직 PD는 프로그램 내에서 모든 걸 휘두르는 권력의 정점에 있다. 개인적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대결 구도는 옳지 않다고 보는데 언론은 예외다. 정규직이 실질적 고용주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작가 일을 하기 위해 고용된 사람이지 주종관계는 아니다. 그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Q. 막내작가의 처우가 변할 수 있을까
A. 사실 회의적이다. PD나 구성원들 개인이 나빠서가 아니다. 실제로 만나면 너무 좋은 사람인데, 방송사 안에서 직함이 붙으면 변하는 것 같다. 개인이 변하는 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방송계 전반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연합뉴스(연합뉴스)

Q. 현재 많은 작가들이 ‘인니’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 것 같다
A. 맞다. 아무 잘못 없는 작가들이 무고한 피해를 겪는 것 같다. 너무 죄송할 따름이다. 이 글을 볼 방송 관계자 분들은 그런 의심을 거둬줬으면 한다. 그분들에게 말하고 싶다. 누가 ‘인니’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방송계 전반에 깔린 갑질 문제 해결이 우선이라는 성찰이 있었으면 좋겠다.

Q. 용기 있는 제보로 다른 방송작가들도 하나 둘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A. 글을 쓸 당시,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배워온 것이 있고 처음의 꿈이 있었다. 앞으로의 희망도 있다. 그런데 현실이라는 무게 때문에 그런 것을 억누르고 살기 싫었던 것 같다. 물론 모든 사람이 무조건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각자의 상황이 있고 어려움의 크기도 개개인마다 다르다. 그런 분들에게 고발을 강요할 수 없다. 준비가 된 사람들이 우선 목소리를 냈으면 바랄 게 없다.

Q. 작가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는가
A. 서로 서로 울타리가 되었으면 한다. 집단행동은 큰 결과를 만든다고 믿어왔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내 폭로 때문이 아니더라도, 작가의 처우를 위해 우리 모두가 힘을 모았으면 좋겠다.

인터뷰를 마치고 인니는 “방송작가 처우에 대해 물어볼 게 있으면 언제든 전화하라”고 말했다. 그땐 통성명을 하자는 약속과 함께. 그의 용기 있는 폭로로 작가의 처우가 개선될 수 있을 수 있을까. 그 출발은 이 기사를 읽고 있는 ‘방송계 을’의 용기와 사회 전반의 관심이다. 많은 을들이 입을 열고 ‘인니’가 되었을 때, 변화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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