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에게 <지식채널e>의 가장 큰 성공요인을 물으면 나는 주저 없이 ‘계몽적 접근 방식’을 탈피한 것이라 답한다. 그리고 그건 그저 뒤돌아보니 그런 것 같다는 ‘총평’이 아니라, ‘1초’편, 그러니까 지식채널e의 첫 번째 편을 만들 때 아주 구체적인 수준에서 프로그램의 주요 컨셉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즉 1초 편 마지막 문장은 방송 프로그램이 갖는 계몽성과, 그러한 계몽적 방송 프로그램이 한 때 많은 이들에게 호응을 받았던 계몽 시대와의 단절을 의미 한다. 지식채널e는 그렇게 계몽의 맨 끝자락에서 출발한 프로그램이다.

지식채널e에는 두 가지 슬로건이 있다. 하나는 ‘생각하는 힘’이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을 움직이는 메시지’라는 것이다. 사실 이 두 슬로건 중 ‘생각하는 힘’이란 것이 훨씬 더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대개 지식채널e를 이야기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자, 즉 ‘감성적 호소’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이고 거기에 대해 집중적으로 이야기를 한다.

▲ EBS <지식채널ⓔ> '괴벨스의 입'편 캡쳐
물론 감성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그 감성은 어디까지나 ‘생각’이라는 부분을 위해 존재하는 수단일 뿐이다. 즉 지식채널e를 보고 사람들이 생각을 하도록 하려다 보니 ‘감성’이라는 것이 꼭 필요했을 뿐, 감성 그 자체를 위해 지식채널e를 만든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만약 그랬다면 굳이 ‘지식’채널e일 필요는 없다. ‘감성’채널e로 만들어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째서 계몽 시대가 종말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을까? 그건 너무나 당연하게도 계몽적 접근 방식을 탈피하는 방향성에 강한 드라이브를 건 지식채널e가 시청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식채널e의 제작 원칙 중 하나가 ‘절대로 가르치려 들지 말자’다. 이게 얼마나 엄격하게 적용이 되냐면 내용만이 아니라 ‘뉘앙스’조차도 절대 계몽적 냄새가 나지 않도록 매우 주의하면서 만든다. 그리고 해당 아이템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고민과 조사를 했다 하더라도, 그래서 그러한 작업을 한 담당 작가(혹은 피디)가 어떤 ‘확신’을(아마 이 확신은 옳은 확신일 것이다)가졌고, 그 확신에 의해 아주 살짝 나름의 견해를 정말 티 안 나게 자막으로 넣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계몽적 뉘앙스’로 조금이라도 느껴지면 무조건 배제했다. 그러다 보니 오직 fact(팩트)로만 이야기하는 것, 그래서 제작진은 철저하게 ‘전달자’로서만 기능하는 것이 지식채널e의 제작 원칙이 됐다.

이는 단순히 겸손하려 들거나 fact만으로 이야기함으로써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한 것과 같은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매우 적극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고, 그렇게 해야만 제작진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빠져들 수 있는 ‘계몽적 유혹’(?)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지식채널e의 성공을 통해 나는 ‘계몽’이라는 틀로 동시대의 다른 프로그램들을 살펴 볼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프로그램이 <돌발영상>과 <무한도전>이었다. ‘탈 계몽성’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음을 금방 눈치 챌 수 있었다. 프로그램만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점차 계몽성 혹은 계몽성으로 대표되어지는 ‘일방성’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벗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이유가 어찌되었든, 혹은 그 이유가 정당하든 정당하지 않든 계몽적 틀 안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는 관념과 물질을 가리지 않았고, 선과 악을 가리지 않았으며, 정파와 이념도 가리지 않았다. 각각 다른 명칭으로 부르고 있지만 결국 ‘탈 계몽성’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변화해 가고 있었다는 말이다.

▲ EBS <지식채널ⓔ> ‘평범한 사람’화면 캡처
이번 선거 결과를 두고 가장 많이 쏟아지는 말들이 정부의 ‘일방통행’ ‘독주’와 같은 것들이다. 이 둘은 계몽적 접근 방식의 전형이다. 만약 ‘4대강 사업’이든 ‘세종시 수정안’이든 계몽적 홍보가 아니라 같이 머리를 맞대고 토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사람들에게 부여했다면 어땠을까? 분명 지금과는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 확신한다. 진보 정치 세력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과연 진보 세력들은 진보 정치의 필요성에 대해 탈 계몽적 접근 방식을 적절히 취했을까? 혹시 그 당위성에 대해 계몽적으로 사람들에게 접근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럼으로써 사람들이 진보에게 매력을 느끼기 보다는 당위적 숙제로 느끼게 한 것은 아닐까?

추구하는 가치와 목적에 상관없이 ‘계몽’은 사람들을 주체에서 밀어 내고 대상화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대상화된 사람은 소외감을 느끼고 당연히 비토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된다. 안티를 만들어 낼 생각이 아니라면 더 이상 사람들을 가르치려 들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똑똑하지 않다고 해서 결코 바보인 것은 아니며 무엇보다 요즘은 계몽을 통해 사람들을 설득하려는 사람들보다 학력을 포함한 전반적인 지적 수준에서‘국민’들이 오히려 더 낫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EBS <지식채널e> 전 담당 프로듀서.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