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파트 모델하우스 ⓒ 연합뉴스
봄철엔 이사가 잦다. 이삿짐을 나르는 고가 사다리의 작동 소리가 아침 잠을 깨우곤 한다. 우리는 현대의 유목민이다. 우리에겐 자기가 사는 곳에 익숙해질 기회가 없다. 만일 익숙해지고 있다면, 그건 떠날 때, 바뀔 때가 됐다는 신호일 뿐이다. 손낙구의 책 <대한민국 정치사회 지도>에 따르면, 전체 국민의 절반이 넘는, 셋방 사는 가구의 80%가 최소 5년에 한번 이사를 한다. 5년이 지나면 동네 사람 3분의 2가 바뀐단다.

마흔 여덟 해를 살면서 열여덟 번의 이사를 했다. 평균으로 치면 2년 반 마다 이사를 한 셈이 된다. 그 중 열일곱 번의 이사는 지금의 아파트로 오기 위한 과정이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셨지만, 필자의 부모는 단 한번도 셋방살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2년 전 이 맘 때 마련한 필자의 아파트는, 대구의 침산동 모 아파트 단지로 480가구가 살며 지방 도시의 중간 계급이 선호하는 33평형대다. 한국 사회 중간계급의 이데올르기는 경제적인 안정을 꿈꾸는 주거환경의 마련이다.

부동산 경기가 주춤하고 있는 요즘이라고 하지만, 그래서 미분양 아파트가 지방의 가장 큰 현안이 되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주거환경은 안정적이지 못하다. '스위트 홈'은 여전히 오지 않을 미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베케트 부조리극의 환타지가 된다. 오늘 아침에도 이삿짐을 옮기는 고가 사다리의 작동소리로 인해 잠을 깼다. 어제는 두 집이 이사를 가더니 오늘은 한 집이 이사를 떠난다. 필자의 같은 아파트 동엔 38가구가 산다. 이를테면 이웃이다. 이들 가운데, 12가구가 지난 2년 동안 이사를 갔다.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눈 인사를 하며 얼굴이 익숙해지려던 참인데, 이웃 가운데 3분의 1이 이사를 떠났고 새 이웃이 이사를 왔다. 모두 고가 사다리로 이삿짐을 날랐다.

자주 이사하는 한국인은 살림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챙겨서 떠도는 유목민을 닮았다. 그래서 낯선 동네로 떠날 때마다 익숙한 것들과 결별해야 한다. 색 바랜 일기장, 젊은 날의 편지, 청춘의 방황과 사색을 부추기던 오래된 책들, 한때 열정을 갖고 몰두했지만 이제는 짐더미가 된 것들을 버려야 한다. 한꺼번에 버리면 가슴이 너무 아플까 봐 일부는 남겨 놓지만, 결국 이사 횟수에 비례해 버리는 것이 많아진다. 한국에서 산다는 것은 이렇게 삶의 기억과 흔적을 지워버리는 일이며, 지친 영혼이 잠시 머물 곳을 없애버리는 일이며, 처진 어깨를 떠미는 일이다. 오로지 진군이다. 전쟁 같은 삶을 위해. - 경향신문 이대근 칼럼 <우리는 모두 외국인다> 가운데

▲ 경향신문 5월 13일자 이대근 칼럼 '우리는 모두 외국인이다'

마흔 여덟 해 동안 열여덟 번의 이사를 하면서, 많은 것을 버렸다.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것들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물리적인 것 속엔 이삿짐에 쌀 수 없었던 추억과 이야기들도 담겨져 있다. 그것을 버리고 이사를 떠나야만 하는 한국의 현대 유목민들이 지녀야 하는 숙명이다. 이사를 다녀야만 했던 기억 속엔 어린 시절의 동무들이 희미하다. 심지어는 대학 시절의 학우들과 함께 찍었던 사진첩 조차 이사 하는 와중에 잃어버려, 젊은 날의 기억은 그냥 뇌 어딘가의 한 구석에서 흐릿한 영상으로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나이 마흔 여덟이 되어서야 단촐한 이삿짐만을 싸들고 옮겨가는 유목민이 아닌, '스위트 홈'속에서 정착민으로서의 꿈을 꾼다. 짐을 버리지 않아도 되는 꿈을 말이다. 하여, 이제 세 돌을 앞두고 있는 첫 딸 아이 그리고 아내의 뱃속에서 세상 구경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둘째 아이와 함께 가족의 '스토리텔링' 만들기를 위해, 더 이상 이사를 가지 않아도 되는 추억만들기를 하고 있다. 비록 도시의 삭막한 아파트 단지라 하더라도 말이다.

허나, 가끔은 두려움에 몸서리를 치다가 잠을 깨곤 한다. 고가 사다리에서 추락하는 악몽을 꾼다. 필자는 20대와 30대 그리고 40대 초반까지만 해도 '스위트 홈'이란 중간 계급으로서의 꿈이 실제 현실에서 이뤄지는 걸 결코 기대하질 못했었다. 아늑한 집장만은 물론이고, 우악스런 현실 사회 속에서 자식을 낳아 교육을 시킨다는 것은 도저히 필자의 현실이 될 수 없는 '머나 먼 쏭바강' 만큼이나 멀고 먼 그래서 오지 않을 '오래된 미래'였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희망이 아니라 갈수록 절망의 시대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헌데, 어쩌다 정말 운이 좋아 '욕망이라는 이름의 고가 사다리'에 그나마 이삿짐을 올릴 수 있었다.

그 욕망은 기독교의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욥'의 드라마다. 신의 시험에 들어 모든 걸 다 잃어버린 현대 한국의 욥은 우리시대의 주이상스다. 욥이 누구인가? 그 시대 부러울 것 없이 나름 누릴 걸 누렸던 인물이다. 그런데 신의 장난으로 모든 걸 잃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신을 원망하지 않고 고난을 헤쳐 나와 신을 증거한다. 우리 시대는 이렇듯 '잃었던 모든 걸 되찾는 결말을 전제'하는 환타지를 강요한다. 이 모든 것은 '욕망이라는 고가 사다리'라는 '신자유주의'가 안겨다 준 환타지다. TV만 켜면 수없이 등장하는 실현될 수 없는 드라마의 스토리텔링은 우리 시대의 '욥기' 즉 성서가 된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지만, 어찌됐든 욥은 천국으로 가는 걸 보장받는 고가 사다리에 이삿짐을 실을 수 있었다.

"월요일이 죽고, 화요일이 죽고 그리고 / 비가 내린 다음 수요일이 죽어갔다 나는 그리운 / 햇볕 한 조각 만나지 못하고 주말까지 계속해서 죽어갔다"라고 노래한 시인 박정대의 '물질적 황홀' 처럼 우리는 매일 죽어야 한다. 그래야 고가 사다리에 그래서 햇볕 한 조각 만나지 못하는 삶을 이렇게 웅켜쥐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여, 우리는 이렇게 '욕망이란 이름의 고가 사다리'와 같은 '신자유주의'에서 내릴 생각을 전혀 할 수 없다. 이게 비극이다. 이른 아침 부터 잠을 깨웠던 고가 사다리 는 이제서야 작동을 멈췄다. 이삿짐 차는 이웃을 어디론가로 옮겨줄 것이다. 어제 이사를 한 이웃은 더 좋은 아파트로 이사를 간 것이라 했는데, 오늘 이사를 한 이웃은 몇 년 전 정리해고로 자영업을 시작한 게 잘 안되어 작은 아파트로 옮기는 것이라 한다. 아! 이 모든 것에 우리는 '아멘'하고 통성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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