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수현 기자] 2017년 12월 31일, MBC 라디오 캐스터 5명이 회사를 떠났다. 원래 공채 아나운서들이 맡는 라디오 뉴스 방송을 전 경영진이 뺏었으므로, 정상화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MBC를 떠났다.

“계약만료 아닙니다. 해고입니다” 지난 12일 만난 김형기씨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2016년 2월부터 2017년 12월까지 MBC 라디오 캐스터로 일했다. 2009년 프리랜서 아나운서라는 일을 시작했다. 국회방송과 YTN, 불교방송까지. 불교방송에선 능력을 인정받아 정규직으로 전환까지 되었다. 그는 2016년 1월 채용공고를 보고 MBC의 문을 두드렸다. 정규직을 포기할 만큼 가고 싶었던 “MBC였기 때문”이다.

라디오 뉴스를 효율적으로 전할 ‘전문적인 팀’을 만든다는 채용 공고였다. “TV뉴스 오디션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는 팀장의 말은 그에게 힘을 줬다. ‘능력에 문제가 없으면 계약이 1년마다 연장될 것’이란 경영진의 구두 약속도 있었다. 합격 후 2년 동안 열심히 일했다. 새벽 5시부터 오후 1시까지의 라디오 방송을 단 한 번의 방송사고 없이 해냈다. 그러나 재계약은 그의 능력과는 무관했다.

상암 MBC 사옥(연합뉴스)

처음 ‘MBC’에 들어갈 때 각오는

라디오 뉴스를 맡을 전문 팀을 구성한다고 했다. (당시 경영진은)TV 뉴스 오디션 기회도 있다고 말했다. 내 능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그냥 원고를 ‘읽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PD에게 의사를 표현했다. 사실관계 오류도 잡아냈고 어색한 기사문을 수정하기도 했다. 열심히 일했다.

정권이 바뀌고 MBC도 변했다. 2016년 팀이 만들어질 당시 아무런 문제 제기가 없었는데, 파업이 끝나고 나니 팀이 없어졌다. 파업을 끝내고 돌아온 노조는 “라디오 뉴스는 아나운서 업무의 근간인데 전 경영진이 외부 인력을 투입해 빼앗았다”고 주장했다.

새 경영진이 들어오고 라디오 캐스터 팀은 해체됐다

프리랜서 아나운서를 팀으로 구성하는 건 흔하지 않다. 보통 프로그램 단위로 계약 하거나, 기존 보도국 소속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MBC 채용은 라디오 캐스터라는 새로운 직군이었다. 팀으로 구성되니까 해체된다고 쉽게 생각하지 못했다.

계약 종료 2주 전, 일방적으로 나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것도 내가 물어보고 나서 말해줬다. “우리 계약 연장은 어떻게 되는가”라고 하니 그때야 연장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아르바이트도 해고하기 전에 미리 고지해주는 시대다. 주변에서 여러 법적 조언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기로 했다. MBC라는 거대 언론사를 상대로 승소한다고 해도 서로에게 상처일 뿐이다. 감정싸움 하고 싶지 않았다.

'MBC 아나운서들, 라디오 뉴스 진행 기회 되찾았다'라는 기사가 있었다. 동의하는가?

기사를 보고 많이 서운했다. 우린 아나운서의 업무를 빼앗지 않았다. ‘라디오 캐스터’라는 전문 직군을 만든 것이다. 만약 ‘라디오 캐스터’가 온당치 않았다면 2016년에 문제제기를 했어야 했다. 심지어 당시 우리 부서의 팀장도 파업에 참여했던 분이다. 2년 동안 성과를 인정받으며 일했는데 정규직 아나운서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동료로 인정도 못 받고 있다.

파업대체인력 반대 성명을 냈다

당시 노조의 파업이 법과 상식에 비춰봤을 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성명을 냈다. 그때 노조 구성원 몇몇은 고맙다는 말도 전했다. 파업 기간 중 다른 동기가 주간 방송의 오디오를 채워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우린 처음부터 노조 대체 인력으로 입사한 게 아니었다. 그때도 우린 ‘계약 외 업무는 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데스크의 요청이 있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걸 노조에 제보했다. 노조는 그 사건을 경영진을 공격하는 하나의 소스로 활용했다. 우리에 대한 비난은 전혀 없었다.

떠날 때 내부 반응은 어땠나

노조와 이야기해봤다. 우리의 상황을 아는 분들은 ‘마음은 너무 공감하나’ 조직 내부의 문제가 있어 도와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반응뿐이었다.

MBC와 라디오 캐스터 계약서 일부(미디어스)

MBC 측은 ‘구두계약은 구두계약이고, 계약서 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그냥 구두 계약을 믿었다. 믿을 수밖에 없었다. MBC니까. 입사할 당시가 파업 중도 아니었고, 공영방송 MBC가 구두계약 사항을 어길 것이라 생각해본 적 없다. 그리고 프리 아나운서들은 방송국에게 절대 ‘을’이다. 우리가 구두계약 사항을 계약서에 넣어달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너 필요 없어, 나가”그럴 것이다. 나 말고 지원자도 많고, 좁은 업계이니 안 좋은 소문 돌면 끝이다.

그런데 현 경영진이 파업 후 복귀하니 나가라고 했다. 전 경영진이 만들었던 팀이 필요 없다는 이유로. 문제는 그렇게 부정하던 ‘전 경영진’과 작성한 불공정 계약서를 근거로 해고를 시킨 것이다. 전 경영진이 만들었기에 존재 이유가 없는 팀이고, 팀 해체 근거가 전 경영진의 계약서? 모순적인 일이다.

근무 3개월 만에 해고당한 동료도 있다

그 친구도 나와 같이 2016년도 입사 시험을 함께 봤다. 회사에서 ‘인력이 비면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일종의 예비합격이다. 1년이 훨씬 지난 2017년 9월에 자리가 났고 회사로 들어왔다. 그런데 계약서는 3개월짜리였다. 당시 회사에선 ‘모두 계약 만료가 12월이니, 그때 다시 계약서를 쓰자’라고 말했다.

MBC와 라디오 캐스터 계약서 일부(미디어스)

MBC와 맺은 계약서에 따르면 ‘을’에게 불리한 내용이 많다

그렇다. 이번 경우와 같이 경영진의 의지에 따라 언제든 잘릴 수 있고 연차 4대보험 같은 것도 없다. 위약금 조항이나 손해배상 청구도 을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다. 그런 계약이 공영방송 MBC에서 자행되었다. 기존 프리아나운서 채용관행에서 우리는 노동약자다. 거의 모든 회사가 이렇고, 계약서를 쓰지 않는 회사도 부지기수다.

MBC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MBC가 싫지 않다. 애정이 있기에 성명도 낸 것이다. 하지만 우리도 동료였다. 함께 일한 동료를 파업 이후 적폐처럼 여기는 건 너무 실망스럽다. MBC가 적폐청산을 한다면, 우리 같은 프리랜서의 대우 문제도 해결해줬으면 좋겠다. 사내 문제로 프리랜서 팀이 없어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를 정규직으로 전환시켜 달라는 말이 아니다. 그냥 공정한 경쟁의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프리랜서 아나운서들도 정규 공채 인력과 경쟁할 수 있는, 그런 기회 말이다.

김형기씨는 마지막까지 MBC에 대한 애정을 보였다. 그는 “MBC 구성원들이 밉지 않다. 나도 파업을 진심으로 응원했고, 우릴 이해해줬던 분들도 많다. 그저 비정규직 인력 처우 문제가 달라졌으면 한다”는 말을 남겼다. 그를 포함한 5명의 라디오 캐스터들은 각자 일을 찾아 다시 떠났다.

김씨는 기사에 실명이 나가 차후 불이익을 받을 수 있지 않냐는 질문에 "단기적으론 내 입지가 좁아질 수 있다. 하지만 이걸 시작으로 프리 아나운서의 처우가 좋아진다면 괜찮다"고 답했다. 이어 “MBC의 적폐청산 작업에서 이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한다. 공영방송이나 대형방송사부터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MBC의 입장을 물어봤다. MBC 보도국의 권순표 팀장은 “그들에겐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설명했다. “원래 라디오 방송은 공채 아나운서가 하던 일이다. 전 경영진이 아나운서국을 무력화하기 위해 고용한 라디오 캐스터다. 그들의 일거리가 없는데 고용할 순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

권 팀장은 해고나 계약 만료라는 말도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라디오 캐스터들은 출연자 개념의 계약을 맺었다. 계약서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업무상 하자가 없으면 연속고용을 약속한다’는 전 경영진의 구두약속에 대해 “그들도 지키지 못할 약속이니까 구두로 한 것이다. 우린 서면 계약을 중심으로 검토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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