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뉴스룸>은 우리 외교부가 다음날 내놓을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단독 보도를 전했다. 일본이 전달한 출연금 10억엔을 일본에 다시 돌려준다는 내용으로 사실상 합의 파기로 본 것이었다. 그러나 JTBC 보도 후 외교부는 곧바로 사실과 다르다는 입장을 내놓아 한동안 오보 아니냐는 설왕설래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9일 강경화 외교부장관의 발표에 조금 더 관심이 쏠렸다. 발표 후 JTBC는 재차 강경화 장관의 발표를 “파기 표현 없는 파기”로 해석해 보도했다. 내용을 보자면 오독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강 장관의 발표문에는 ‘파기’나 ‘재협상’ 등 일본을 자극하는 단어들은 없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한일 위안부 합의 처리 방향에 대한 정부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도 이번 발표를 파기로 읽어도 무방한 것은 직접적인 표현보다 행간에 담겼다고 할 수 있다. 문제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국가 간의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것은 외교적 부담이 매우 크기 때문에 쉽사리 파기 선언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렇다고 국민감정과 특히나 당사자인 피해 할머니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합의를 준수할 수도 없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 외교부가 찾아낸 방법은 간단해 보이면서도 효과적이라는 평가다.

강경화 장관은 발표를 통해 “일본 정부가 출연한 화해·치유재단 기금 10억엔은 우리 정부 예산으로 충당하고 이 기금의 향후 처리 방안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와 협의하도록 하겠습니다”라며 “일본이 스스로 국제적·보편적 기준에 따라 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피해자들의 명예·존엄 회복과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한 노력을 계속해 줄 것을 기대합니다”라고 했다.

일본 측에서 보낸 돈 10억엔에 대해서 돌려준다고는 하지 않았지만 쓰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면서 사실상 가져가라는 의미를 담았고,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진실의 인정’과 ‘피해자 명예·존엄 회복과 상처 치유를 위한 노력’을 강조함으로서 내용상 2015년의 한일 위안부 합의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또 한 가지 놓쳐서는 안 될 대목은 ‘일본이 스스로 국제적·보편적 기준에 따라 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이다. 이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한일 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계여성 인권문제라는 사실을 밝힌 것으로 한일 간의 재협상이 아닌 국제적 차원에서의 일본군 성노예 피해 진실을 다룰 수 있는 지속성과 확장성을 스스로 마련한 것이다.

강경화 장관, 한일 위안부 합의 처리 방향 발표 (PG) Ⓒ연합뉴스

이는 국가 간의 합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일본 국가 권력에 의한 피해 당사자의 고통과 저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뛰어넘을 수 없음을 천명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이번 발표의 핵심적인 의미를 담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비단 한국만이 아닌 아시아의 많은 피해자의 문제를 포함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한일 위안부 합의는 아시아·태평양에 산재되어 있는 국제적 피해자들로부터 당연히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일본 측도 곧바로 반응을 내놓아 위안부 합의 추가 요구는 절대 못 받는다고 의례적인 으름장을 놓으면서도 발표문 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며 설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일본의 반응을 들여다보면 우리 정부의 의도를 알겠지만 딱히 대응할 방법을 찾지는 못한 눈치다. 여전히 강경한 어조를 유지하고 있지만 왠지 모르게 일본의 기가 한풀 꺾인 분위기다. 그렇다면 기존 합의를 ‘파기 없이 파기하겠다’라는 우리 정부의 전략은 일단 나쁘지 않은 시작을 보인 것으로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 발표로 한일 위안부 문제를 해결한 ‘신의 한 수’라고 성급하게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묘수를 찾기는 했지만 아직 외통수라고 입증된 것은 아니다. 또한, 위안부 피해 할머니 지원단체들이 재협상을 하지 않겠다는 우리 정부의 입장에 비판적인 것도 부담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복잡한 외교 언어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 강경화 장관도 끝에 가서 이번 발표가 피해자들이 바라는 바를 모두 충족시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죄송하다는 말을 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어차피 근본부터 잘못된 위안부 합의를 아무런 피해 없이 되돌리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번 발표는 장도의 그 첫걸음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멈추지 않을 것도 분명하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