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달력 한 장/ 짐짓 무엇으로 살아왔냐고/ 되물어 보지만/ 돌아보는 시간엔/ 숙맥같은 그림자 하나만/ 덩그러니 서있고/ 비워야 채워진다는 진실을/ 알고도 못함인지/ 모르고 못함인지/ 끝끝내 비워내지 못한 아둔함으로/ 채우려는 욕심만 열두 보따리 움켜쥡니다...'

- 오경택 <12월의 공허> 중

한 해를 보내는 심정은 대부분 위의 시와 같을 것이다. 돌아오지 않을 시간, 그 시간에 채워 넣지 못한 아쉬움, 그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일까? 연말 TV 프로그램은 각 방송사 별로 '내 논에 물주기'식 공치사 시상식으로 떠들썩하게 채워진다. 그 화려한 쇼와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덧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고, 스리슬쩍 새해가 치고 들어온다. 그 어수선한 연례행사가 번잡스러운 사람들은 그래서 일찌감치 TV를 꺼버리고 만다. 그런데 다행히, 그런 천편일률적인 연말 TV 프로그램에 변화가 생겼다. 바로 2부작 드라마를 편성한 JTBC이다. 2017년 12월 31일 8시 40분부터 2부작으로 <한여름의 추억>이 방영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고전적 하루> 갈라콘서트로 차분하게 한 해를 마무리하도록 했다.

사랑을 통해 한 해를 반추하다

JTBC 드라마페스타 <한여름의 추억>

최강희 주연의 <한여름의 추억>은 2부작 드라마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원히 물기가 탱탱 넘치게 살아갈 것 같았지만 어느 틈에 서른일곱이 된, 그리하여 더 이상 여자가 아닌 '휴먼'이 되어버린 한여름. 그럼에도 여전히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었던(?), 라디오 작가였던 한여름의 '지난' 사랑 이야기를 드라마는 반추한다.

드라마는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들의 그녀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청소년 시절 그녀가 첫사랑이었던 남자 최현진(최재웅 분)은 맛선 자리에서 그 첫사랑을 그저 '찧고 까불었던' 불쾌한 기억으로 거부한다. 지금의 애인과 언쟁 과정에서 그녀를 기억해낸, 대학 시절 그녀와 캠퍼스 커플이었던 김지운(이재원 분)은 그 시절 불같이 화를 내며 떽떽거리던 열정적인 그녀가 싫었다. 지금 그녀와 프로그램을 같이 하는 피디 오제훈(태인호 분)은 솔직하고 당찬 그녀가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그녀와 3년이나 사귄 끝에 결혼을 결심했던 박해준(이준혁 분)은 결국 자신의 청혼을 본인의 욕심으로 거부했던 그녀로 인해 '결혼'에 대한 기피증이 생겼다.

서른일곱 한여름을, 그녀가 소녀 시절부터 사랑해왔던 네 명의 남자를 통해 설명한다. 첫사랑 앞에서 내숭이 심했던 소녀. 자유분방하고 감정기복도 심하고, 자신의 감정에 거침이 없었던 20대. 사랑하지만 자신의 욕심 때문에 불안정한 직업의 팝 칼럼니스트와의 결혼을 기꺼이 거부하던 서른 무렵의 여전히 자신만만했던 여성. 그리고 영원히 빛날 줄 알았건만 어느 틈에 빛을 잃은 채 스스로 한없이 초라하다고만 느끼는 서른 후반의 한여름. 드라마는 '사랑'이라고 쓰고 그녀가 가장 애착을 가지고 맺어왔던 관계들을 통해, 그리고 그 관계들을 반추하는 한여름을 통해 '삶'을 되새긴다.

JTBC 드라마페스타 <한여름의 추억>

흔히 '이불 킥'이란 용어가 가장 적확하게 이루지 못한 지난날의 부족했던 사랑을 설명하듯, 한여름이, 그리고 그녀를 기억하는 남자들의 기억 속에서 지난 시간들은 미처 채워내지 못한 자신들의 '욕심, 욕망'들이다. 그러나 그 채워지지 못한 욕망들은 1부의 마지막, 뜻하지 않게 한여름에게 닥친 사고로 인해 빛깔을 달리하기 시작한다.

'사실은 12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다/ 생각해 보라/ 12월이 없으면 새해가 없지 않은가/ 1년을 마감하고 새해가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 천상병, <12월은 참말로 잔인한 달이다> 중

천상병 시인의 말처럼 한 해를 보내는 공허함, 지난 사랑에 대한 회한, 우리의 마음속에서 스며 나오는 이 '아쉬운 감정'들은 결국 아직도 여전히 더 잘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의 다른 이름에 아니다. 하지만 마치 ‘12월 다음에 다음 해가 시작되지 않는다면?’처럼 더 이상 이 세상에 한여름이 존재하지 않는 순간, 그녀와의 추억들은 다른 버전의 해석으로 기억된다. 드라마는 절묘하게 한여름의 지난 사랑을 통해 우리의 시간들을 설명한다.

아쉬움, 회한? 그건 삶의 다른 이름

JTBC 드라마페스타 <한여름의 추억>

솔직하지 못했던 소녀 여름은 첫사랑의 풋풋한 속내였으며, 그 질리도록 떽떽거리던 젊은 날의 한여름은 20의 솔직하고 열정적인 감정이었다. 여러 부담 없는 변수 중의 하나였던 그녀가 남긴 마지막 솔직한 말은 이제 자신의 상처 난 자존심에 철갑을 두룬 이제훈에게 던져진 진솔한 충고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세상에서 사라진 뒤에 전해진 뒤늦은 사과는 늦지 않게 박해준의 상처를 어루만진다.

드라마 주인공의 이름 '한여름'은 중의적이다. 여주인공의 이름이자 동시에 12월 31일에 만나는 반가운 '여름'의 열기라는 계절적 배경이다. 또한, 언니네 집으로 떠나는 한여름이 남긴 마지막 인사말처럼 찰나와도 같은 시절, 찰나와도 같은 시간, 찰나와도 같은 관계의 기억을 뜻한다. 세숫물도 온천수 같다며 제발 에어컨을 사자고 조르던 김지운의 말이 무색하게 어느새 선선한 바람에 밀려가버리는 여름은, 이제는 기억으로만 남겨진 한여름의 생이다. 그리고 그 한여름을 통해, 우리는 2017년과 함께 가고 있는 각자의 지난날을 반추해 본다.

아쉬움으로 헛헛한 시간, 빛나고 싶었지만 초라했던 기억들. 하지만 그 초라함조차 결국 이 세상에 존재하기에 가능했던 아쉬움이라는 것을 드라마가 충격적으로 알려주는 순간, 한 해를 보내는 회한의 시간은 충분히 반짝거렸던 기억들로 새롭게 해석된다. 아프지만 아름답게 한여름을 기억해내는 그의 옛사랑들처럼 말이다. 덕분에 쓸쓸함이 아니라 여름과 같았던 2017년의 추억으로 한 해를 마감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된다.

언제나 그렇듯 '최강희'였기에 가능했다. 20대와 30대, 심지어 빛을 잃었다던 서른일곱에도 반짝였던 한여름을 설득했던, 2017년 겨울이 선사한 여름날의 온기 같던 드라마 <한여름의 추억>. 부디, 2018년 12월 31일에도 이런 뜻깊은 선물을 또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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