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이 유행이다. 사전적 의미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활동, 이야기가 담화로 변하는 과정’을 뜻하는 스토리텔링은 극영화를 비롯해 다큐멘터리와 같은 사실의 기록을 다룬 영상부터 시작해서 디지털 게임 그리고 광고와 같은 마케팅에서도 적용되고 있다. 상품의 가격과 이미지만을 밋밋하게 보여주는 광고의 시대는 이제 식상하다. 스토리텔링은 소비자에게 상품을 더 각인시켜 줄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상품의 얽힌 이야기를 가공한다든지 또는 평범한 사람 또는 명인들의 이야기를 들러줌으로써 소비자로 하여금 구매욕을 자극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스토리텔링 기법은 실제 이야길 쓰는 경우도 있고 전설, 신화, 게임 등에 나오는 스토리를 차용하는 경우도 있다.

▲ 이명박 대통령은 24일 오전10시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서 천안함 관련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했다. 이 대통령은 "이제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어떤 나라도, 천안함 사태가 북한에 의해 자행됐음을 부인할 수 없게 됐다"며 "북한의 책임을 묻기 위해 단호하게 조처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 청와대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전문가가 아니라도 인터넷 등 모든 정보를 공개적으로 접할 수 있고 많은 데이터를 공유하고 생산할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렇게 공유되고 생산되는 주제에 대한 데이터는 쌓여가기만 할 뿐, 그에 대한 연결고리와 주제는 없어지고 다만 하나의 정보로만 취급될 수 있다. 그러기에 이와 같은 정보는 스토리(Story)라기 보다는 데이터(Data)에 불과하다. 축적된 정보 즉, 데이터를 주제와 본래의 목적에 맞는 이야기로 설득력있게 꾸미고자 한다면, 그에 맞는 이야기를 만들어가야 하는데 이 과정이 스토리텔링의 원리다.

<살인의 추억>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진실에 대한 영화다. 진실과 거짓이라는 주제는 서태윤 형사(김상경 扮)가 계속해서 "서류는 거짓말하지 않는다"라는, 결말에서의 반전을 암시하는 명제를 내세움에서 확인된다. 이 영화를 하나의 메타포로 간주한다면, 진실을 찾는 것은 일종의 미궁 속 수사와도 같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대부분의 관객은 "박현규(박해일 扮)가 범인이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적어도 영화 속에서,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서사 속에서 박현규는 결코 범인이 아니다. 사람들은 '우연'을 신뢰하지 않는다. 관객은 '우연'은 우연이 아니라, 숨은 관계의 암시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박현규를 범인으로 지목했던 이유는 '우연' 때문이었다. 박현규를 둘러싼 수많은 간접적 정황들이 영화 속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 박현규를 범인으로 증명할 만큼 많이 말이다.

<살인의 추억>은 하나의 공식으로 우리에게 스토리텔링을 한다. 이러한 스토리텔링은 우리의 '판단'을 판단할 공식이 된다. 우리의 판단은 사실에 기초해 있어야 한다. 모든 음모 이론은 하나의 가능성으로서의 가치밖에는 없다. 방증이 일백이라도 소용 없다. 직접적인 증거를 대는 것이 필요하다. 허나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전개되는 스토리텔링은 관객의 공식과 판단을 비합리적인 결론에 치닫게 한다. 허구와 비허구는 스크린 안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의 공간과 생각 속에서 이렇게 혼돈된다. 그것이 스토리텔링의 힘이다. 관객으로 하여금 이렇게 혼돈할 수 있게 하는 스토리텔링이 없었다면 영화 <살인의 추억>은 수없이 제작되어 스크린에 걸리는 그렇고 그런 영화가 됐을 것이다.

재미없는 영화를 볼 때 관객은 종종 시계를 들여다 본다. "으으으... 영화가 언제 끝나지?" 일어나 극장 밖으로 나가고 싶지만, 입장료가 아까워 그러질 못한다. 영화 상영 중에 관객들이 시계를 본다는 것은 단순히 이야기가 지루해서일 수도 있지만, 이야기가 구성적으로 잘 짜여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대체 이 이야기가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 앞으로 얼마나 더 나아갈지를 알고 싶다는 뜻이다. 그런데 잘 짜여진 이야기는, 보는 동안 관객이 기승전결을 저절로 알게끔 한다. 시계를 보게 하는 여유 조차 주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시계를 자꾸 들여다 보는 재미없는 수퍼 울트라급 정치 희극인 장편 영화 <천안함의 추억>을 보고 있는 중이다. 영화가 끝나는 시점은 2010년 6월 2일이다. 영화의 시작은 백령도 근해에 가라앉은 천안함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분명 비극이었다. 영화 <살인의 추억>처럼 천안함의 진실은 일종의 미궁 속 수사와도 같았다. 하여 진실과 거짓이란 스토리텔링으로 모든 관객을 흠뻑 빠지게 하더니, 영화의 중반 이후 부턴 나약하기 그지 없는 '북한'이란 악역을 등장 시킴으로써 이야기는 곧 흥미진진함을 잃어버린다. 비극이 희극으로 변태하는 순간이다. 물론 영화의 초반에 '북한'의 가능성이 슬쩍 엿보이긴 했다. '북한'이 범인일 것이라는 간접적 정황들이 속속들이 발표되지만, 관객은 시큰둥하다. 스토리텔링의 실패다. 한때 이러한 '북한'을 통해 레드콤플렉스를 자극하는 스토리텔링이 강력한 힘으로 발휘됐던 시절이 있었다. 북한이 괴물일 수 있었던 것은 한국 전쟁이란 트라우마와 실제로 우리 보다 강력한 체제였던 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허나 21세기에서 북한은 그저 일개 덜떨어진 골통 왕조 국가에 불과하다. 일인당 국민소득 2만불인 체제가 2백불도 채 안되는 체제를 두려워 하는 꼴이다. 고양이가 궁지에 몰린 생쥐를 발로 눌러 놓고도 두려워 하는 장면이 우리 앞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영이 끝나는 시점인 6월 2일까지 <천안함의 추억>이란 영화의 제작자와 감독은 초등학생까지 외면할 만한 내용으로 무리하게 이야길 끌어가고 있다. 생각 같아선 극장을 박차고 나오고 싶을 정도다. "아.. 내가 왜 이 귀중한 시간에 이런 쓰레기같은 영화를 봐야할까?" 영화가 상영되는 대한민국이란 극장은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 없다는 게 이 영화를 봐야 하는 관객의 비극적 숙명이다. 그러다보니 관객은 이 재미없는 영화가 빨리 끝나, 다음 편으로 상영될 '남아공 월드컵'이란 대하 스포츠 드라마를 목놓아 기다릴 뿐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스토리텔링은 이야기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 듣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언제 울릴지, 언제 웃길지 철저하게 계산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하는 게 중요하다. 당신이라면 지금 대한민국이란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는 <천안함의 추억>이란 이 영화에 어떤 별점을 주고 싶은가? 하기사 이 재미없고 식상한 스토리텔링에 별 다섯개를 주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지금대로라면 자칫 이 영화는 어정쩡한 흥행대박이 날 조짐마저 보인다. 좀 거시기 하지 않을까? 6월 2일 영화가 종료된다. 우리는 이 영화에 과감하게 별표가 아닌 똥표를 던져야 한다. 그 똥표는 이야기의 구성도 치밀하지 않고 억지로 가득한 어설픈 스토리텔링에 반박할 수 있는 당신의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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