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 송도 가족사랑병원에 마련된 금양호 선원 고 김종평씨의 빈소. ⓒ오마이뉴스 박상규
우리가 놓치고 사는 것이 어디 하나둘이겠냐만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한국의 어부와, 이름조차 발음하기 어려운 외국의 어부가, 모두가 다 아는 이름의 누군가를 구하겠다고 바다에 나가서 실종되고 심지어는 시신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잊어버린다면 장담하건데 우리에겐 희망은 없다, 희망은 이미 죽었다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한 여자 연예인이 밤에 몰래 유가족을 찾아가 손을 잡고 같이 울었다고 하는 기사를 봤다. 난 그녀가 광우병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혹은 하지 않았는지 따위엔 관심이 없다. 어차피 사람들은 광우병을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해하든 미국산 소고기를 잘 사먹지 않기에 그녀의 발언을 꼬투리 잡는 것 자체가 공허하기 때문이다. 대신 내가 주목하는 건 그녀가 유가족과 함께 한 야밤의 두 시간이다.

서둘러 금양호 선원 관련 기사를 찾아 봤다. 생각보다 그들의 이름 하나하나, 그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찾기는 쉽지가 않았다. 특히 발음하기도 힘든 외국인 선원의 얼굴은 그들의 죽음만큼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 순간 내가 관념적으로 이해하던 ‘희망이 없다’ 따위의 말은 그들의 얼굴 앞에서 무색해 졌다. 대신 그녀가 유가족과 함께 했다는 두 시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무언가 알 수 없는 분노와 증오와 슬픔이 범벅이 되어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왜 내가 울컥했는지는 나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어쩌면 그건 ‘희망은 없다’라고 말은 하면서도 정작 내 안의 희망에 대해서는 돌아보지 않았던 오만함에 대한 반성일 수도 있고, 혹은 한 여자 연예인의 소리 없는 행동에 단순히 감동한 것일 수도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원 유가족의 가슴속에 얼룩져 지워지지 않을 '한'을 새겨내는 우리 사회에 대한 분노일 수도 있다.

▲ 배우 김규리가 지난 4일, 금양호 유족들의 요청에 싸인을 해주었다.ⓒ 민중의소리

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분명한 건 그녀의 두 시간이 내게 전해 준 무언가였다. 아마 그것을 나는 '진정성'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맞다. 나는 그 단어를 참 오랫동안 중얼거렸지만 그 단어를 다시 느끼기는 참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고마왔고, 미안했고, 부끄러웠다.

아무리 많은 말을 떠들고, 아무리 많은 논리를 개발하고, 아무리 많은 용맹함을 내보여도 손을 잡고 같이 울어줄 따스한 가슴이 없으면 그런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 것들은 아무 희망도 만들어낼 수 없다. 아무 희망도 기억해낼 수 없다. 아무 것도 희망이 될 수가 없다.

오늘이 5.18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틀지 못하게 한다는데 그렇다면 나즈막히 휘파람 소리라도 내어볼까. 두 시간이 아니라 단 2분 만이라도 말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EBS <지식채널e> 전 담당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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