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영화하면 느와르라는 말이 딱 떠오를 만큼, 어둠의 세계를 그린 작품들이 대세를 이룬다. 그 대세로 인해, 이제는 노년줄에 들어가는 한때 청춘들에게 '로망'의 대상이었던 홍콩 영화는 뜨고 져버렸다. 그리고 최근 '범죄물' 중심의 우리 영화를 두고, 홍콩 영화를 빗대 우려를 표명하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지난주 <전체관람가>를 통해 선보인 이명세 감독의 <그대 없이는 못 살아>를 보면 상업영화, 그중에서도 스토리 중심 이야기에 한국 영화계가 얼마나 기울어져 있는가가 방증된다. 그러나 스타일리스트 이명세 감독이 그 스스로 한번도 현역을 떠난 적이 없다 하지만 10년 만에야 TV 예능프로그램이 마련한 단편영화를 통해 신작을 선보일 수 있었듯, 최근 박스오피스에서도 보여지듯 작품성 있는 영화라 평해져도 화끈한 오락적 요소를 가미한 범죄영화의 아성을 무너뜨리기가 쉽지 않다. 그렇게 기울어진 운동장에 용감하게 플레이어로 등장한 한 사람이 있다. 바로 <기억의 밤>의 장항준 감독이다.

이게 도대체 몇년 만인가? 감독 장항준!

영화 <기억의 밤> 촬영 현장

이명세 감독이 10년 만이라지만, 영화감독 장항준은 도대체 얼마 만인가? 그의 필모를 검색하면 2008년작 <전투의 매너>와 <음란한 사회>가 등장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감독 장항준은 2002년 <라이터를 켜라> 연출, 2003년 <불어라 봄바람>과 <북경반점(1999)>, 그리고 <박봉곤 가출사건(1996)>의 각본, 그 기발한 상상력의 장항준이다. 그 후 아내 김은희 작가와 2011년작 <싸인>으로 화려하게 부활했으나, 불운의 명작이라 일컬어지는 2012년작 <드라마의 제왕> 이후 그의 작품을 TV에서도 보기 힘들어졌다. 예능프로그램과 특별 출연은 빈번했지만, 감독으로서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건 <무한도전>을 통해서였다. 그런 그가 '정말' 오랜만에 작품을 들고 감독으로서 돌아왔다.

하지만 <기억의 밤>이 반가운 것은 장항준의 작품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범죄 영화가 주류를 이룬 혹은 역사물이라 하면 역사적 사실을 복기해내는 정도에 머무르는 제작 환경에서, 모처럼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창작물' 본연의 가치를 살린 작품의 등장이라는 의의가 <기억의 밤>을 돋보이게 만든다.

영화 <기억의 밤> 스틸 이미지

<기억의 밤>은 흔히 우리 영화계에서 빈번하게 차용되는, 원인과 결과가 '기승전결'의 형태로 연결된 서사의 방식을 뒤집는다. 영화는 21살의 삼수생 진석(강하늘 분)의 악몽으로부터 시작된다. 고문의 장면으로 연상되는 악몽을 꾸다 깨어나는 진석. 그런 그를 맞이한 건 이제 막 새집으로 이사를 하려고 하는 그의 가족, 아버지(문성근 분)와 어머니(나영희 분) 그리고 형 유석(김무열 분))이다.

그런데 새로 이사 온 집이 낯설지 않다. 더군다나 먼저 집주인이 짐을 남기고 간 방이 자꾸 진석의 신경을 거스른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어느 날 형이 납치되고, 19일 만에 돌아온 형은 어쩐지 진석이 알던 그 형이 아닌 것 같은데...

전작을 통해, 그리고 외모의 분위기를 통해 선한 인상이 각인된 강하늘이라는 배우가 진석으로 등장하고, 그 주변의 인물과 상황이 의심을 더해가며 당연히 관객은 진석과 함께, 이 '호러'인지 '스릴러'인지 헷갈리는 영화 속으로 흡인된다.

스릴러를 통해 현대사의 비극을 설득하다

영화 <기억의 밤> 스틸 이미지

이 영리하고 교묘한 전략은, 이후 진행되는 반전을 통해 애초 장항준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1997년 IMF가 한국 사회에 끼친 ‘상흔’을 설명하는 가장 절묘한 장치로 작동한다. 결국 한국 사회에 불어 닥친 뜻밖의 위기, 그리고 그 위기 속에서 사회 안전망 없이 '가족'의 단위로 그 파고를 맞닥뜨리며 극단적으로 해체되는 가족, 그 속에서 파멸을 맞게 되는 개인을 영화는 가슴 아프게 설득해낸다.

초반부 한 치 앞도 예측하기 힘든 스릴러의 모양새가 후반부에 가서 장황한 부연설명으로 이 뒤엉킨 사태를 설명해내는 아쉬움은 남지만, 애초 이 영화의 방점이 그 시대의 아픔을 표현해 내고자 하는 데서 출발한 것이기에 불가피하지만 충분히 여운이 남는 사족으로 인정할 만하다.

영화 <기억의 밤> 포스터

무엇보다 <기억의 밤>이 돋보이는 건, 한 국가 한 사회의 위기가 금모으기 따위의 운동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미담'으로 치부될 수 없는, 그 사회 소속 개인들의 몇십년 지난 삶에까지 비극적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묵시록적 주제의식이다. 그러나 이 묵직한 주제의식을 그간 한국 영화가 해오듯 직설적이고 선언적으로 다룬 것이 아니라, 마치 이미 맞춰진 퍼즐의 판을 새로이 뒤집어 하나하나 맞추어 가듯, 장항준이라는 각인이 분명하게 아로새겨진 '기발한 창의력'에 기반을 둔 트릭과 설정으로 풀어가려 했다는 점이다.

특히, 이렇게 선후가 바뀐 이야기에 퍼즐 맞추기식 스릴러가 빠질 수 있는 삼천포 없이, 한국 사회 자체의 질을 변화시킨 분명한 시대적 사건에 발을 디딘 굳건한 중심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처럼 제대로 영화다운 영화 한 편을 봤다는 쾌감과 함께, 현대사의 회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양 손에 쥐고 뿌듯하게 돌아오게 만든다. 역시 장항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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