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관람가>에서 이명세 감독의 별칭은 '명스나이퍼'다. 앞서 작품을 선보였던 감독들에게 동료 감독들이나 mc들이 '주례사 비평' 급은 아니더라도 서로 계속 얼굴을 맞대고 이 프로그램을 이끌어 가야 하기에 웬만하면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에 비해 이명세 감독은 날카로운 촌철살인의 한 마디를 남기거나 평가를 유보하는 등 냉정한 잣대를 들이댔기 때문이다. 자신의 작품을 방영할 시간이 다가오면 주변에선 말수가 점점 적어진다고 우스개를 했지만 <전체관람가>에 참여한 대부분의 젊은(?) 감독들에 비해 연배나 활동 시기도 한참 '선배'인 이명세 감독의 고민은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 보였다.

하지만 기우였다. 노장은 죽지 않는다. 그리고 사라지지도 않았다. 10년 만에 어렵게 만든 영화, 단편 영화로 치면 학생 때 작품 이후로 어언 40년 만이다. 하지만 젊은 감독들은 입을 모은다. 연세가 무색하게 가장 열정적으로, 가장 감각적으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그저 나이가 많아서 노장이 아니라 앞서 살아간 사람의 용기를 그렇게 이명세 감독은 설득하고, 그 노장 감독의 활약에 젊은 감독들은 눈시울을 적신다.

명스나이퍼였던 이명세 감독이 앞서 작품을 한 감독들에게 한 질문들은 일관됐다. 한 달여의 촉박한 시간, 제작비가 넉넉지 않아 짧은 촬영 회차로 인해 전전긍긍하는 젊은 감독들에게 그럼에도 작품이 완성도가 있는가? 단편이라는 형식 안에 어울리는 작품인가? 그렇게 이명세 감독의 날카로운 질문은 앞선 감독들의 선감상 후리플로 남겨진 과제처럼 그의 작품이 그 해답을 줄 차례가 되었다.

영화에 대한 설명을 작품을 통해 보여주셨다
- 홍승혁 촬영감독

왜 노장은 돌아왔을까?

JTBC 예능 프로그램 <전체관람가>

우리 영화계에서 이명세 감독을 스타일리스트라 부른다. '서사'보다 화면의 색감, 구도 등등에 방점이 찍힌 그의 전작들이 남긴 수식어다. 하지만 영화 <스파이>에서 중도 하차한 후 더 이상 스타일리스트 이명세의 작품을 더는 볼 수 없었다. 2000년대 이후 상업 영화가 주류가 된 영화계는 대중을 쉽게 유인할 수 있는 '드라마' 위주의 영화를 선호했고 이미지를 통해 소통하고자 하는 이명세 감독의 자리는 없었다.

그런 이명세 감독이 10여 년의 기다림 끝에, <전체관람가>라는 콜라보 예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연배에, 그 경력에 위신을 운운할 만도 하건만 기꺼이 한참 후배들과 자리를 나란히 하여 '동료'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명세 감독은 그저 기회가 없어서 이 자리에 왔을까? 이명세 감독은 말한다. 비록 10년 만의 기회이지만, 자신은 영화에 대한 여전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고. '드라마'로 대체되고 있는 영화에 대해 이미지, 움직임이 결합된 이미지로서의 영화를 설파하기 위해 기꺼이 후배들과 한자리에 있게 되었다고.

그리고 덧붙인다. 자본에 의해 침식된 영화계에서 단편이야말로 마지막 남은 영화의 자리, 혹은 영화의 본령이 될 수 있기에 기꺼이 참여한다고. 이런 이명세 감독의 출사표는 그의 작품을 감상한 후 '영화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한편의 시와 같다는 평가로 이어지며 바로 그런 이명세 감독의 의도가 성공적으로 관철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런 이명세 감독이 작품과 메이킹 과정을 통해 설파한 여전한 그의 주장은 여느 서바이벌 예능처럼 낙오자들을 모아놓은 리얼 버라이어티로서의 구차한 형색을 지녔던 <전체관람가>의 프레임을 변화시킨다. 이미 앞서 박광현 감독의 <거미맨>이나 이원석 감독의 <랄라랜드>를 통해 '예능'이나 투자 받지 못한 감독들의 생존기를 벗어나 '자본'을 넘어선 모험과 도발을 시도했던 바 있는 <전체관람가>는 이제 이명세 감독에 이르러 그 본래의 '단편 영화 활성화'의 의도를 제대로 관철해 낸다. 투자 받지 못해 장편으로 할 수 없었던, 혹은 흥행이 안 될 거 같아 할 수 없었던 긴 이야기를 줄인 짧은 이야기가 아니라 말 그대로 '한 편의 시'로서 단편 영화의 본질을 <그대 없이는 못 살아>가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 것이다.

이미지로 설득한 '데이트 폭력' 아니 '사랑의 본질'
스완의 심장은 질투로 미친 듯이 쿵쾅거렸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사랑스럽던/ 그녀의 눈을 파내고 싶었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JTBC 예능 프로그램 <전체관람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저 짧은 문구로 시작된 영화는 바로 이명세 감독이 선택한 주제 '데이트 폭력'을 대번에 설명해 낸다. 그리고 영화는 보는 이들을 마치 6,70년대의 흑백 영화와 같은 화면 속으로 끌어들인다. 커다란 캐리어를 힘겹게 끌고 가는 여자, 한눈에 봐도 누군가에게 맞은 듯한 그녀의 멍든 얼굴. 쫓기듯 구멍 난 스타킹, 그리고 여자의 힘으로 끌고 가기에는 버거운 캐리어, 그 상황에서 굳이 구구절절 덧붙이지 않아도 시청자들은 어떤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힘겹게 끌고 가던 캐리어를 방치하려다 친절한 행인들에 의해 돌려받은 여자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캐리어를 끌고 계단을 오르다 놓치고, 그 순간 어떤 친절한 남자가 몸을 날려 그 캐리어를 구하며 득의양양하게 그녀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도 잠깐, 열린 틈으로 캐리어의 내용물을 보게 된 남자는 기겁을 하며 도망을 치고 그 남자를 여자는 사생결단으로 쫓아간다.

이 영화의 화룡점정은 바로 이 쫓고 쫓기고, 결국은 친절이 파멸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다. 영화배우 대신 현대 무용가 김설진을 '남자'로 캐스팅한 <그대 없이는 못 살아>는 이미 강렬한 이미지의 배우 유인영과 함께 그와 그녀의 추격전을 연출하며 이명세 감독의 전편 영화에서 트레이드마크처럼 차용된 그림자 액션을 스스로 오마주 하는가 하면, 폐 회전목마를 이명세 감독의 조감독 출신의 감독들이 수동으로 작동하는 가운데 조명만으로 현실과 꿈을 오가는 몽환적 상황을 연출해 낸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한낱 꿈속의 꿈인가/ 꿈속의 꿈처럼 보이는 것인가
- 영화 '개그맨' 중에서 이명세

JTBC 예능 프로그램 <전체관람가>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그림자 액션이나 일찍이 영화의 시원이 된 에드워즈 마이브리지 '달리는 말'의 창조적 오마주인 회전목마에서 빛으로 조명된 사랑과 폭력의 설정이 그저 '미장센'이라는 말, 이 영화가 내세운 주제 '데이트 폭력'을 넘어 영화 마지막 자막 R.M 릴케의 시 '사랑은 너에게 어떻게 왔던가'처럼 남자와 여자의 사랑, 그 본질에 대한 질문을 남긴다. 즉 이명세 감독이 보여주고자 하는 '이미지'가 곧 영화가 되는 순간이다.

메이킹의 과정에서부터 눈물을 훔치던 감독들은 결국 영화 감상 후 기립 박수를 기꺼이 보낸다. 혹자에게는 1도 이해가 되지 않는 영화이지만 그럼에도 '움직이는 그림'으로서의, 이해하는 것이 아닌 느끼는 것으로서의 영화의 본령에 대한 질문과 주어진 주제에 대한 철학적 화답을 한 이명세 감독의 영화는 그 자체로서 '영화'의 길에 대한 '멘토'로 자리매김한다.

평소 장편을 찍을 때 배우가 연기를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내기 위해 그 누구보다 오랜 시간을 촬영하기로 소문난 이명세 감독, 하지만 적은 예산과 짧은 시간에 군말을 덧붙이는 대신 짧은 시간에 찍기 위해서 연습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사람과 사람이 함께 하는 작업으로서의 영화론을 피력한다. 나이가 들어 노장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시대와 젊은이들을 앞선 열정과 혜안의 연륜으로 설득한 '선배'의 자리를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 내며 이명세 감독은 레전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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