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곧 메이커가 된 <응답하라> 시리즈, 이 시리즈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화제가 된 핵심 코드 중 하나는 '낭만적인 복기'일 터이다. 마치 ‘어렵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예전이 좋았어’라며 과거를 회상하는 '과거부심'인 것이다. 그런 '낭만적 복기'의 시리즈 <응답하라>가 가장 과거로 간 시대는 1988년. 어쩌면 그건 낭만의 ‘마지노선’이 1988년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른바 '민간인 코스프레'였어도 노태우 대통령의 당선으로 '직선제'의 민주주의 시대를 열었던 1987년 이후에야 우리의 현대사는 '낭만'이라는 걸 그래도 논할 만한 여지가 생겼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란제리 소녀시대>는 저돌적이게도 낭만적이어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79년의 한 시절로 시청자들을 이끈다. 아마도 4%의 콘크리트 시청률에 기여하는 것 중 하나는 혹시나 또 한 편의 <응답하라>일까 하고 봤다가 생각 외로 심각한 그 시절의 공기가 부담스러워 질겁한 시청자들이 있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바로 이 낭만적이지 않은 암울했던 시절의 공기가 바로 유신시대를 마무리해가던 79년의 정서다.

79년 비극적 정서를 잉태한 첫사랑

KBS2 월화드라마 <란제리 소녀시대>

<란제리 소녀시대>는 <응답하라>처럼 전형적인 '첫사랑'의 삼각관계 구도로 설정된다. <응답하라>의 덕선이, 나정이, 시원이처럼 '천방지축 유쾌발랄한 소녀' 정희(보나 분), 그리고 그녀가 흠모하는 전교회장 교회 오빠 손진(여회현 분), 그리고 첫 미팅에서 정희에게 반해 일편단심 정희 바라기인 동문(서영주 분), 동네 총각 영춘(이종현 분), 그리고 다크호스로 등장하여 영춘과 손진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린 혜주(채서진 분)가 그 주인공들이다. 여느 청춘물처럼 서로 얽히고 설켜 사랑하고 질투하고 갖은 해프닝을 벌이던 이들의 사랑에 <란제리 소녀시대>는 '시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한다.

교수인 아버지를 따라 대구로 전학 온 혜주는 여학생들의 '브래지어 끈'을 당기는 모욕감어린 체벌을 하는 오만상(인교진 분)에게 부당함을 제기하는 당당한 여학생이다. 공부는 물론 오자마자 모의고사 전교 1등을 할 만큼 발군이다. 전교회장 손진의 시선을 한눈에 낚아챌 만큼의 청순한 미모에, 방송반 아나운서를 맡을 만큼 재능까지 있다.

이 모든 것을 다 갖춘 완벽한 혜주. 하지만 손진은 그녀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바로 그녀의 아버지가 '빨갱이'였기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반정부 시위를 주동하고 도피한 학생을 숨겨준 혜주의 아버지는 그 연루자가 되어 하루아침에 사라진다. 경찰서장인 손진의 아버지는 혜주의 아버지를 빨갱이라 낙인찍으며 혜주 주변에 얼씬거리지도 말 것을 강요한다.

KBS2 월화드라마 <란제리 소녀시대>

그 시절 '빨갱이'는 그랬다. 호환마마보다 더 무섭다고 극장의 '대한뉴스'는 주입을 했고, 6.25전쟁의 레드 콤플렉스를 교묘하게 이용한 정권은 그를 확대재생산하여 반정부 세력에게 그 '호환마다보다 더한 빨갱이 낙인'을 거침없이 찍어버렸다. 제 아무리 예쁘고 공부 잘하고 아버지 교수라도, 그 아버지가 빨갱이이면 아무 것도 아닌 것보다 더한 것이 되어버린 시절.

사라진 아버지의 향방을 몰라 혜주는 노심초사하지만, 그런 혜주의 동정을 보고하라 교감 선생이 담임에게 지시를 내리는 시절. 그 지시를 거부할 수 없는 담임이 그 불편한 심정을 학생들의 체벌에 항의하는 혜주에게 운동장 100바퀴라는 화풀이로 표출해내도 하등 문제가 되지 않던 시절. 혜주가 걱정되어 그 집 앞에서 얼쩡거리는 것만으로도 경찰서장 아버지에게 뺨이 날아가도록 맞던 시절의 비극을 <란제리 소녀시대>는 첫사랑의 불온한 공기로 담아낸다.

마치 조선시대의 사랑이 '역적'으로 몰려 하루아침에 멸문지화를 당한 가문의 이야기를 통해 '비극'을 잉태하듯이, '난사람'이었던 혜주는 하루아침에 동네 사람들의 소리 없는 외면과 입방아의 대상이 되어 배척받는 처지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사랑조차 흔한 선남선녀의 꽃길 대신, 그 어려운 때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 준 영춘에게 의지하는 곡진한 순애보에 기대는 뜻밖의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애증의 여성 연대

KBS2 월화드라마 <란제리 소녀시대>

그렇게 혜주가 시대적 비극을 사랑의 비극으로 잉태해가는 동안, 그 사랑의 경쟁자였던 정희는 혜주와 미묘한 우정의 관계로 전환된다. 제목에서 상징되듯 평범한 런닝과 끈런닝으로 대변되는 '패션'의 갈림길에서 늘 '평범함'의 처지에 아등바등 거리던 정희에게, 그러기에 혜주는 선망과 질투의 대상이었다.

<응답하라> 시리즈에서도 아버지는 말끝마다 '가시나'를 입에 달고 살며 딸을 타박했지만, 그 공기와는 다르게 심지어 공부를 잘해도 쌍둥이 오빠 앞길을 막는다고 대놓고 차별을 받는 것이 당연한 시대. 그 당연한 차별에 안간힘을 쓰는 정희는 선생님 앞에서 모욕적인 체벌에 항의하는 혜주의 운동장 100바퀴의 동반자가 된다.

혜주가 선뜻 친구가 되자 했지만 좋아하는 손진 오빠야의 마음을 빼앗은 혜주에게 늘 불편했던 정희. 같이 운동장을 달리지만 그래도 혜주를 앞지르고 싶던 그 복잡한 마음으로 드라마는 절묘하게 엇갈린 우정을 표현한다.

그리고 오빠에겐 메이커 옷을 사주면서도 정희는 독서실도 안 보내주던 엄마가 정작 오빠 대신 독서실을 가는 정희에게 회초리를 드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같이 죽자며 우산대로 정희를 때리다 결국 정희 방으로 베개를 들고 오는 장면은, 우리 시대 질긴 모성연대의 지난한 역사를 고증한다.

그렇게 <란제리 소녀시대>는 '낭만'이라기엔 무겁고 짓눌린 79년의 시대상을 절묘하게 드라마로 담는다. <응답하라> 시리즈 뺨치게 적재적소에 등장하는 'feeling'을 비롯한 '파파', 'sing' 등 당시의 유행 음악은 이런 시대의 사랑에 아이러니한 낭만을 제공하며 그 운명의 정서를 극대화시킨다. 비록 시청률은 응답하지는 않았지만, 이 드라마를 본 사람들이라면 그 여운이 긴 음악들만큼 오랜 잔향을 잊지 않을 것이다.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바라봅니다.
톺아보기 http://5252-jh.tistory.com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