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시리즈는 드라마계에 새로운 시대극의 조류를 형성하게 했다. 1988, 1994, 1997이란 특정 연도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는 그 시대를 살아낸 세대에게는 추억을, 젊은 세대에게는 과거라는 추억을 바탕으로 한 '순정'의 코드가 사랑의 진정성을 더하며 '열광'을 불러왔다.

그 이전에 시대극이라고 하면 '사극'이거나 '일제시대', 혹은 '6.25'를 배경으로 한 협소한 범주를 의미했지만 <응답하라> 시리즈는 이를 확장, 계발하였다.

물론 <응답하라> 시리즈가 처음은 아니었다. <TV소설>이라는 이름 아래 KBS에서 꾸준히 방영된,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들이 있었지만, 주로 중장년층의 향수에 기댄 이들 아침드라마와 달리 전 연령대에게 적극적 호응을 얻어 '시대극'의 새로운 장을 연 것이다.

<응답하라>의 70년대 확장판

KBS2 월화드라마 <란제리 소녀시대>

9월 11일 방영된 KBS2 <란제리 소녀시대>는 <응답하라> 시리즈를 통해 확장된 시대극의 70년대 버전처럼 찾아왔다. 대구를 배경으로 70년대의 시대적, 사회적 배경을 흐드러지게 풀어내며 드라마는 시청자들을 그때 그 시절로 이끈다.

<응답하라 1988>의 쌍문동 골목길의 정서를 두고, 동시대를 살았던 친구와 갑론을박을 벌인 적이 있다. 동시대 전혀 다른 곳에서 자란 두 사람은, 드라마 속 1988년이란 배경을 그려낸 제작진에 대해 호와 불호의 의견을 나누었다. 왜 같은 시대를 공유했음에도 그 추억에 ‘이견’을 보였을까? 그건 아마도 같은 서울 하늘을 이고 살았어도, 가스렌지와 석유풍로로 대변되는 삶의 다른 층위가 가져온 반응일 것이다.

이는 언젠가 2017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만들어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강남 타워팰리스와 변두리 반지하방의 삶이란, 한 시대 하나의 지역적 추억으로 뭉뚱그려 그려낼 수 없는 차별적 층위를 가진다. 그런 다른 경험의 층위가 내는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시대를 내세운 드라마들은 시대를 ‘대변’하는, 그 시대를 산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문화적 코드'에 집중한다. 새로이 방영된 <란제리 소녀시대> 역시 마찬가지다.

KBS2 월화드라마 <란제리 소녀시대>

<란제리 소녀시대>의 주인공은 여학생도 '교련'을 배워야 하던 그 시절의 여고생이다.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을 통해 이제 하나의 시대적 코드가 된 김지영 세대, 드라마는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며 자랐던 그 시절에서 한 발 더 과거로 발을 담근다.

같은 반의 공부도 잘하고, 심지어 시도 빼어나게 쓰던 친구가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여상'을 선택하던 시절, 교련 선생님이든 수학 선생님이든 이제는 '성희롱'이 될 수도 있는 벌을 받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던 그 시절을 <란제리 소녀시대>는 충실하게 복기해낸다. <란제리 소녀시대>가 방영되고 드라마 게시판에 올라온 '여자도 교련을 했어?'라는 댓글처럼 신기한 시절이었다.

70년대만 해도 융성하던 섬유산업의 중심지였던 대구. 당시에는 흔했던 가내수공업 수준의 메리야스 공장, 체벌이 시스템처럼 갖춰져 횡행했던 교실을 드라마는 충실하게 구현한다. 그리고 란제리란 제목답게 하얀 백런닝과 끈 달린 런닝으로 대별되는 당시 소녀들의 '속옷 로망'을 드라마는 놓치지 않고 그려내며 시대의 세밀화를 완성해 간다. 본인 역시 무심하게 드라마를 보던 중 그 '끈 달린 런닝'에서 움찔하고야 말았다. 여고 시절, 교복에 비친 그 두 줄의 끈은 정말로 당시 여학생들에게는 '여성성'의 로망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드라마 속 '사물'들은 아마도 그 시절을 살아온 그 누군가의 추억 속 '어떤 것'들을 자극하며 이 드라마 앞으로 끌어들이게 될 것이다. <응답하라>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등장하는 주인공들, 전교회장 교회 오빠 손진(여회현 분)과 그런 오빠를 흠모하게 되는 여고생 정희(보나 분). 그런 정희에게 미팅 자리에서 첫눈에 반해버린 순정파 동문(서정주 분)과 다크호스처럼 등장한 서울에서 온 혜주(채서진 분), 그리고 그 시절 있음직한 동네 총각 영춘(이종현 분)까지 70년대 시대극의 전형적 요소를 빠짐없이 채워 넣었다.

추억은 여전히 힘이 세다?!

KBS2 월화드라마 <란제리 소녀시대>

이런 주인공들의 면면은 아침드라마 <TV소설>을 통해 반복 학습되다시피 한 70년대 인물의 전형적 갈등 구조이다. <란제리 소녀시대> 역시 다르지 않다. 첫 회, 교회 오빠 손진과 문학의 밤을 통한 우연한 만남, 그 첫사랑의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고 집에서 먼 도서관까지 손진을 보러 가는 해프닝 과정은 <응답하라> 시리즈는 물론 그런 시대극에서는 '클리셰'라 해도 과언이 아닌 내용이다.

하지만 뻔한 클리셰의 중복이라 해도 아침드라마 <TV소설>이 계속 되풀이될 수 있듯이, 모처럼 미니시리즈로 찾아온 70년대의 복기는 70년대스러운 화면과 음악이란 양수겸장의 장치로 인해 추억을 찐하게 자극한다. 그리고 그 '맞춤양복'처럼 잘빠진 70년대의 추억은 신기한, 그래서 새로운 콘텐츠로 젊은 세대를 솔깃하게 만든다. 적어도 첫 방송의 <란제리 소녀시대>는 '추억'의 힘으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적인 듯 보인다.

과연 79년 여름 대구라는 구체적 시간을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는 그저 '추억'의 복기만으로 끝날까? 10.26을 코앞에 둔 79년 그 여름의 끝에서, 주인공들이 어떤 성장통을 보여줄 것인지, 8부작이라는 실험적 형식을 통해 주제의식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 궁금해진다. 비록 시청률 면에서는 아쉬웠지만 신선한 시도였던 <완벽한 아내>의 홍석구 연출과 윤경아 작가 등 제작진의 여정이 기대를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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