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발’이라는 게 정확한 표현일 듯하다. 24일 종영한 MBC <죽어야 사는 남자(이하 죽사남)>가 수목드라마 대전에서 거둔 성과 말이다. 22회 기준 12.8%(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라는, 이제 이 정도면 지상파에서는 중박이라고 치는 시청률을 전제로 하지만, 시청률 이상의 '지상파 미니시리즈'에 대해 생각해 볼만한 문제제기의 기회를 '도발'했다.

'근본이 없는'이 아닌, 근본이 제대로 있었던 죽사남

MBC 수목 미니시리즈 <죽어야 사는 남자>

마지막 회, 딸을 찾고 가족을 이루어 자신의 인생에서 진정한 행복을 이룬 사이드 파드 알리 백작(최민수 분)은 친지들을 이끌고 전세 비행기를 동원하여 보두안티아 공화국을 향해 떠난다. 신이 나 비행기에서 원맨쇼를 벌이던 백작. 하지만 기상 변화에 흔들리던 비행기는 끝내 엔진에 불이 붙고 뜻하지 않은 곳에 불시착한다. 뻘에서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살아남은 백작과 그 가족, 친지들. 그들을 맞이한 건 괴수의 음성 같은 효과음이 들리는 무인도로 추정되는 섬이다.

내내 가족드라마인 줄 알고 '화목한 해피엔딩'을 꿈꾸던 시청자는 종영 10분을 남겨놓고 나타난 백작의 또 다른 아들 때문에, 아버지에게 '죽빵을 날리는' 존속 상해의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헌데 그도 모자라, 전 재산을 날릴 뻔했던 해프닝에서 벗어나 희희낙락 딸과 함께 헐리웃 생활을 즐기는가 싶더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무인도행으로 마무리 짓는 드라마에 '어이상실'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되돌아보면, 이게 과연 어이상실할 일인가 싶다. 애초 가상의 보두아티아 공화국에서 나타난 석유재벌 바람둥이 아빠란 '희귀한' 설정에서 시작된 드라마는, 바람난 남편을 아내 바보로 개과천선을 시키는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 안 되는 것이 없는 행보를 보였다. 악녀의 딸 코스프레라는 막장 가족극의 소재와 남편의 바람, 그리고 헤어진 친딸 찾기, 심지어 치매 등 한국 드라마에서 그간 전형적으로 등장했던 소재를 차용했지만, <죽사남>은 이중 어떤 클리셰에도 천착하지 않고 단 1분의 진지함을 넘기지 못하는 코믹하고 엉뚱한 서사로 드라마를 반전에 반전으로 이끌어 갔다.

그러나 아버지와 딸이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는 첫 장소가 '헌팅'을 위한 클럽이었다는 기가 막힌 설정에서 시작된 코믹한 반전들만을 가지고 <죽사남>을 평가하면 아쉽다. 오히려, 진짜 이 드라마의 매력은 동시간대 드라마들이 어설픈 사랑 놀음에 16부작 혹은 32부작의 이야기를 늘이고 있는 동안, 짤막한(?) 24부의 쾌속 정진을 통해 '가족'의 의미를 파고들어 들어갔다.

MBC 수목 미니시리즈 <죽어야 사는 남자>

클럽에서 만난 아빠와 딸이 서로의 존재를 알기 전에 인간적 교감을 나누고, 딸의 존재를 알아차렸지만 쉽게 다가서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서로의 상처로 인해 고통 받고 보듬어 가족으로서의 교감을 회복해 가는 과정을 <죽사남>은 그 어떤 가족 드라마보다 정갈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풀어냈다. 특히 <내조의 여왕> 고동선 피디 특유의 섬세한 정서의 교감이, 때론 어수선할 수 있는 '코믹' 드라마의 정조를 따스하게 감싸며 드라마의 본질을 놓치지 않았던 점이 무엇보다 <죽사남>의 장점이라 할 것이다.

그렇게 가족 드라마이면서, 그 서사 방식에 있어서는 기존 드라마들이 의존했던 진부한 설정 에 단 한번도 기대지 않았던 김선희 작가의 뚝심 있는 전개는 한류에 의존하여 어설픈 소재와 연기 혹은 작가의 명망에 기대어 안일한 소재와 더 안일한 연기로 매회를 인공호흡하는 타 미니 시리즈와의 차별점을 더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가족을 전면에 내세웠기에 우리 사회 가족을 여전히 이상향으로 그려내지만, 드라마는 결코 가족이란 이름으로 개인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아버지는 딸의 아버지로 돌아왔지만 그 특유의 '유아독존' 스타일을 버리지 못했고, 심지어 바람둥이 기질조차도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남편의 불륜은 곧 이혼이 되어버린 드라마의 공식에서 응징과 개과천선이라는 모색은 수긍은 둘째치고라도 신선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진정한 갑인 부의 문제에 있어서도 '판타지'를 버리진 못했지만, 사람을 그에 굴복시키지 않고자 노력한다. 무엇보다 악인의 처리에 있어서조차 '인간적'인 기조를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심지어 중동 진출 일꾼이었던 장달구, 현 알리 백장의 과거를 추적하는 '국정원' 직원을 통해 산업화의 그늘에 가려졌던 산업일꾼의 역사까지 헤아리는 내공을 드러낸다. 가족이라는 진부한 소재를 다루지만, 그 다루는 방식은 '인간친화적’이었던 <죽사남>의 패기 넘치는 도전은 최근 부진을 겪고 있는 지상파 미니 시리즈의 진짜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절묘한 삼각편대, 최민수 그리고 신성록과 강예원

MBC 수목 미니시리즈 <죽어야 사는 남자>

그런데 <죽사남>의 가장 큰 도발 중 하나는 다름 아닌 출연진이다. 최민수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란 단언을 하게 만든, 거의 원맨쇼에 가까웠던 그의 보두아티아 백작 연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지만 그런 최민수의 연기만이 있었다면 <죽사남>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드라마가 되었을지 모른다. 최민수의 무대를 충실하게 받쳐준, 아니 사실은 최민수가 앞서나가서 그렇지 그 연기의 내공에 있어서는 만만치 않다 싶었던 강호림의 신성록과 딸 이지영의 강예원 연기 역시 이 드라마의 빼놓을 수 없는 공신이다. 가짜 딸 이지영의 이소연과 비서 앞달라의 조태관은 눈을 즐겁게 만든 감초로서 드라마를 넘기게 했다. 갈수록 그의 몸짓 각도가 커져만 가던 최민수와 그걸 흥겹게 받아쳐준 신성록과 강예원의 연기는 마치 '변검'의 한 장면처럼 가장 감동적인 가족애의 현장으로 시청자를 이물감 없이 이끌며 드라마의 수목 1등이 되도록 하는 데 헌신한다.

이처럼 <죽사남>은 그간 그의 연기 내공이 무색하게 소모적으로 소비되던 한때 잘나갔던 배우 최민수에게 새로운 대표작을 제공했다. 최민수에게 대표작이 <모래시계(1995)>만이 아니라, <사랑이 뭐길래(1991)>와 영화 <미스터 맘마(1992)>와 <결혼 이야기(1992)>도 있었다는 것을 상기시켜준 <죽사남>. 무엇보다 왕년의 배우가 아닌 ‘현역’으로서 최민수가 아직 건재하다는 것, 그와 함께 한류스타가 젊은 청춘스타가 아니라도 연기를 맛깔나게 하는 배우들의 조합이라면 거뜬히 드라마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신성록, 강예원 불패신화로 증명해냈다. 이런 <죽사남>의 선전은 부메랑이 되어 결국 최근 부진의 늪에 시달리는 지상파 드라마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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