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대선 국면에서 “문재인은 주사파가 아니냐”는 질문에 “아니다”라는 대답을 사석에서 많이 했던 기억이 있다. ‘종북몰이’하지 말라는 뜻도 있었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대화로 일관하는 대북정책 철학의 소유자는 아닌 걸로 보인다는 의미기도 했다. 근거는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이 회고록 문제가 불거지던 시기의 혼란상이다.

당시 송민순 전 장관의 주장은 2007년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기권 표결 방침을 정할 때 문재인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북한의 입장을 반영하도록 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참여정부 인사들은 “문재인 당시 비서실장은 오히려 찬성 표결 입장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해명은 “기억이 안 난다”는 것이었다. 보수세력은 이 발언을 “북한의 입장을 반영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의미로 왜곡 선전했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오히려 ‘찬성 표결 입장’을 취한 정황이 실제로 있기 때문에 기억이 안 난다는 답변이 나온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일화와 최근 상황을 보면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정책에 대한 기본 철학은 ‘표준’에 가까운 걸로 보인다. 보수세력은 정책적 편향성을 과장해서 연일 공격하지만 ‘수사’를 걷어내고 냉정하게 따지면 문재인 대통령의 청와대는 대다수의 정책적 쟁점에 대해 ‘표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사실 이는 문재인 대통령이 정치인으로서, 또 통치자로서 갖고 있는 최대 장점이다. 전임 정권이 ‘비상식’의 끝을 보여줬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문제는 ‘표준’이 아니라 창조적이고 비상한 대안이 필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거다. 지금 대북정책에 관한 문제가 그렇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현지시간 8일 골프를 치며 휴가를 즐기던 중 “북한이 미국을 위협하면 지금껏 전 세계가 보지 못한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갑자기 이런 말을 한 이유는 워싱턴포스트 등의 언론의 보도 때문이다.

이들 미 언론은 미 국방부 산하 국방정보국이 지난달 북핵 개발 프로그램에 대한 기밀평가를 통해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미사일에 탑재할 수 있는 소형핵탄두 개발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북한이 미국 본토에 핵공격을 하기 위해 필요한 두 가지 조건 중 하나가 이미 해결된 것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대기권재진입 기술이다. 북한의 지난 ICBM급 미사일 시험 발사 이후 언론은 한미 군 당국이 대기권재진입 기술 확보까지 1~2년 정도의 시간이 남은 것으로 판단했다고 보도했다. 결론적으로 미 언론 보도가 사실이라면 미 본토에 대한 공격능력이 완전히 갖춰지기 까지 남은 시간이 1~2년 뿐이라는 결론이 가능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7일 오전 청와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통화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청와대)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조율’된 것으로는 보이지는 않는다. 대북제재결의에 중국과 러시아가 동참하게 만든 공신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미국 대사를 둘러싼 해프닝을 보면 그렇다. 니키 헤일리 대사는 북한 초계정에 대함 순항미사일이 탑재돼 있어 군사 도발이 예상된다는 내용의 미 언론 보도에 대해 “당신들은 단지 특종을 하는 게 아니라 인명을 갖고 노는 것”이라면서 “유출이 어디서 일어났든 간에 그로부터 권력과 명성을 얻으려 하는 사람은 미 국민을 위험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같은 시각 트럼프 대통령은 폭스 뉴스 트위터 계정의 해당 보도 트윗을 ‘리트윗’하고 있었다. 그간 ‘낙마설’이나 ‘교체설’에 시달려 왔던 허버트 맥매스터 NSC 보좌관이나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 뿐만 아니라 니키 헤일리 대사까지 트럼프 대통령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이 드러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골프를 치다가 한 발언 역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문제는 미국 내 여론의 표준적 반응이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미 언론과 정치인들은 연일 예방전쟁과 선제타격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격앙된 국민 여론의 반영이다. 그런데 전쟁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미 의회가 전비 지출 승인을 하기 어려운데다 북한의 한반도에 대한 즉각 반격 가능성이 있는 만큼 자국민에 대한 소개 등 관련 절차가 복잡해 ‘기습’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 ‘포기하자’는 반응도 나온다. 중앙일보가 뉴욕타임스에 3일 실린 걸 8일 지면에 전재한 제프리 루이스의 글이 대표적이다. 핵 비확산 전문가인 제프리 루이스는 1964년 미국이 중국의 핵무기 개발 단계를 과소평가해 어쩔 수 없이 핵보유국으로 인정한 사례를 들면서 이번에도 같은 함정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북한의 핵무장을 (군사행동으로) 해제하려는 시도는 미친 짓이다”라고 했다.

군사행동을 택하지 않고 미국이 북한의 핵 공격 가능성을 인정하는 유일한 시나리오는 ‘북한 핵보유국 인정-평화협정-주한미군 철수’를 선택하는 것뿐이다. 얼마 전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등이 제시한 중국과의 ‘빅딜론’으로 가는 징검다리로 볼 수 있는 논리인 것이다. 그런데 이 선택지는 트럼프 행정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내세우고 있는 대중무역 불균형 해소라는 문제로 볼 때 선택하기가 쉽지 않다. 중국에 대한 경제적 압박이 북핵 문제 해소의 지렛대가 되고 있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유엔 대북제재 결의 과정에서 ‘슈퍼 301조’가 거론된 게 한 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중국이 북한을 강력히 압박해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건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을 지속적으로 압박할 수단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중국이 북핵 문제를 해결하든 그렇지 않든 표면적으론 손해 볼 것이 없는 게임이다. 이렇게 보면 당분간은 평화협정 시나리오를 선택할 이유가 별로 없다.

그러나 북한이 ICBM을 통한 미 본토 타격 능력을 완전히 갖추게 되는 시점이 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결국 미국이 중국과의 게임에서 충분한 이익을 확보한 후 대북 평화협정을 선택하고 손을 떼느냐, 아니면 한반도 전쟁을 선택해 중국과의 갈등 구도를 이어가느냐라는 양자택일의 고독한 시간은 오고야 말 것이다. 그전에 사태를 해결하지 않으면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운명은 뜻하지 않은 국면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8월은 여러 의미로 뜨거울 것이다. 8월 말부터 시작되는 한미연합군사훈련은 동아시아의 갈등을 이중으로 고조시킬 것이다. 북한의 도발과 남중국해 문제를 둘러싼 미중의 힘겨루기가 동시에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유엔 대북제재결의 표결 직후 ‘공화국 성명’을 낸데 이어 8일 “서울 불바다”라는 표현이 포함된 보도를 관영매체를 통해 강행하고 9일 괌을 포위사격 하는 작전방안을 검토하겠다는 등의 ‘말폭탄’을 쏟아 붓고 있는 것부터가 심상치 않다.

또, 중국이 서해에서 대규모 실전 군사훈련에 들어간 것 역시도 의미심장하다. 액면만 보면 북한과 미국을 동시에 의식한 걸로 해석할 수 있지만 결국 미-일-호주가 지속하기로 한 ‘항행의 자유’ 작전과 부딪치는 상황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중국과 북한이 손을 잡고 미국 일본 호주와 갈등 구도를 만드는 그림은 평화협정 시나리오의 일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복잡다단한 갈등이 첨예화되면 우리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적어도 ‘표준적인’ 한도 내에서는 사실상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래서 창조적이고 비상한 대책이 필요하다. 그런데 북한의 ICBM급 미사일 시험 발사 직후 우리 정부의 행보는 ‘표준’ 그 자체였다. 사드를 ‘임시배치’ 하기로 했고 트럼프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핵잠수함 건조를 언급했다. 무역불균형 문제를 “첨단무기 구입”으로 해소하자는 제안도 내놨다. 미사일 사거리 연장과 탄두 중량 확대 등의 협의도 시작한다고 한다. 북한의 도발 수위에 맞춰 우리의 군사적 대응 수위를 높이는 전형적 대응이다.

이런 흐름은 한편에서 ‘자주국방론’의 강화로 이어질 것이다. 예를 들면 해군 출신인 송영무 국방부 장관의 소신은 핵잠수함을 건조하고 이지스함에 SM-3 미사일을 탑재하는 것이다. 이 지론에 따르면 다층적 미사일 방어망을 구축하기 위해 사드도 구매해야 한다. 송영무 국방부 장관이 대선 전에 내놓은 주장은 사드를 구매해서 우리 군이 배치 운용하면 중국도 크게 반발하지 못할 것이라는 거다. 물론 이런 인식이 현실적인지 따져봐야겠지만 적어도 자주국방론의 큰 틀에서 논할 수 있는 문제라는 건 사실이다. 23년 만에 공군 출신 합참의장이 탄생해 언론이 ‘육방부’가 해체되고 있다고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공군과 해군 전력의 강화로의 중심 이동은 군의 대미종속성 내지는 의존성을 약화시킬 것이다.

물론 이는 긍정적이고 최종적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임에는 분명하다. 그런데 이 흐름은 미국이 평화협정을 선택하는 퍼즐의 유력한 한 조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맥락을 함께 보면 최악의 경우 남북관계가 대화국면으로 전환되지 않은 상태에서 주한미군 축소 내지는 철수가 현실화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지금 이 상황에 대한 철저한 준비가 돼있는 게 아니라면 ‘표준’을 선택한 결과가 ‘파국’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표준’이 문제가 아니라 ‘표준’에만 머무르는 게 문제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3일 개각을 단행하기 앞서 총리관저로 출근하고 있다. (연합뉴스/교도통신)

가장 뼈아픈 상황은 ‘창조적이고 비상한 대책’을 일본이 선취하는 것이다. 이른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방북설이 그것이다. 정치적 위기에 빠진 아베 신조 총리가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한 방북을 강행해 지지율 만회에 나설 거라는 내용이다. 주변국들의 상황을 보면 이는 쉽게 실현되기 어려워 보이지만, 아베 신조 총리가 과거부터 이 선택지를 고려해왔다는 게 문제다.

이미 2013년 이지마 이사오 내각관방참여가 비밀리에 방북을 했고 2014년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이 아베 신조 총리의 방북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아베 신조 총리가 늘 옷깃에 달고 있는 푸른 리본 배지에는 납북자 조기 석방과 구출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소신’이란 얘기다. 아베 신조 총리는 자민당 간사장 대리 자격으로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의 방북에 동행한 ‘경험’도 있다.

물론 일본과 우리는 다르니 문재인 대통령이 방북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에 필적할만한 어떤 행동이 있어야 한다. 반드시 ‘대화(dialogue)’를 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개입(engagement)’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움직일 공간이 없다. 오히려 움직여야 공간이 생기는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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