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최고의 무사 송태하가 저자 왈짜패 추노꾼 대길에게 졌다. 살귀 황철웅마저도 가볍게 제압했던 송태하의 생애 최고의 굴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고수들의 대결에서 승부는 미세한 방심으로 결정된다는 무협지의 교훈에 따라 태하의 패배를 수긍할 수 있다.

서로 무기로 겨룬 일차 대결에서는 가볍게 태하가 승리했다. 그러나 언년의 정인이었기에 살려 준다는 태하의 말에 "미천한 집안 종년에게 마음을 줬을 것 같나?"하는 말에 충격을 받는다. 그것이 이 둘의 승부를 가를 중요한 관건이었다.

승부에 대한 논란이 다소 있는데, 그 말끝에 기습한 대길에게 상투를 잘려나갈 정도로 이미 태하는 마음의 중심을 잃었고, 이어 언년의 지난 말들을 회상하는 것으로 고수가 지켜야 할 동중정의 자세를 잃었다. 둘의 화려한 액션에 하마터면 놓칠 번한 중요한 단서였다. 그렇게 대길이 태하를 붙잡아 한양으로 돌아감에 따라 추노는 15회까지 풀어놓았던 많은 문제들을 정리하고 종반을 향해 숨 가쁘게 달릴 채비를 갖췄다.


아직 대길에 대한 설화의 연정, 업복에 대한 초복의 마음 등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그녀들의 사랑은 대길과 언년의 경우처럼 극 흐름을 좌우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더 진전이 되거나 혹은 멈추거나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아직 정체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두 명의 기생, 노비당수 등 세 사람은 앞으로의 사건 전개에 따라 자연스럽게 밝혀질 것이지 특별히 반전을 주도할 존재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사실은 연적의 관계인 대길과 태하의 관계가 극적으로 변화하게 된다는 점이다. 철웅이 그들 모두의 적이 된 탓이다. 철웅이 아니면 연적에다가 오해까지 겹친 이 둘을 화해시킬 방법이 없다. 또한 대길과 태하의 불편한 화해로 인해 더 이상의 추노는 없다. 거꾸로 양반세상을 향한 거친 저항으로 이어질 것이다. 스포일러의 유혹이 아니라 그렇게밖에는 진행될 방향이 없다.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은 업복이와 초복이 등 지금까지 삽화처럼 이어오던 에피소드들을 통해 이야기 되었다. 특히 15회에 업복의 주인은 종의 딸을 소 한 마리에 팔아넘기기 전에 먼저 자기 방에 불러들여 욕구를 채운다. 그리고는 다음날 부모와 생이별을 한다. 그때 떠나는 딸의 봇짐에 그나마 성한 버선을 몰래 질러 넣는 초복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기껏 이용하고 배신하는 토사구팽의 존재, 겉으로는 엄숙한 척 군자를 논하지만 실제로는 여종의 몸이나 탐하는 양반들. 그것에 팔자려니 저항도 못하는 부모. 이 기막힌 배경은 추노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시대상이며, 부분적으로 혼돈과 개연성의 부재가 혼재했던 주연들과는 달리 일관된 톤으로 유지되었다.

사내들의 거친 무협 사극이라 초복이나 주모 등이 전해주었던 에피소드들은 다소 무심히 지나칠 수 있지만 추노가 지향하는 주제에 대한 진정한 메시지가 이들을 통해 표출되고 있다. 길고긴 추적 끝에 태하가 붙잡히고, 목숨이 위태한 상황 속에서 얼핏 느슨한 듯 노비들의 고초를 그리고 있는 에피소드들은 의외로 큰 의미를 갖는다.

16회에서 특히 개인적으로 주목한 장면은 노비당수를 만나고 돌아가는 업복과 초복의 대화이었다.

업복이 먼저 "그렇게 양반, 상놈 구분 없이 사는 세상이 좋은 거 아니나?"하고 묻자, 초복은 "양반 상놈 구분 없는 세상도 좋지만, 복수는 하고 싶어요. 지금 양반들한테.."그리고는 눈물 그렁한 눈으로 세상에 둘도 없는 쑥맥 업복에게 "오늘은 안 업어줘요?" 한다. 업복은 놀라며 "니 또 다리 다쳤나?"한다. 그 후 이어지는 실루엣은 참 슬프고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요즘 작가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이 대목만은 상당히 문학성이 짙은 장면으로 인상 깊었다. 행복해질 수 없는 둘의 미래에 대한 아픈 복선이 짙게 깔렸다.

16회의 명장면은 주막으로 돌아와 밥 세 그릇을 차려놓고 먹는 대길의 오열신이었다. 지금까지 대길은 언년이 때문에 울었지만 이번에는 시청자들도 그토록 애타게 그리워하는 최장군과 왕손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몸부림쳤다. 언년에 대한 집념으로 잔정 없이 대해온 대길에게 떠난 두 형제에 대한 회한이 사무칠 수밖에 없었다. 언년과 형제 모두를 잃은 고통을 아주 일상적인 밥상을 통해 표현한 장혁의 열연은 화면 밖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조차 그의 고통 속으로 가둬버렸다.

그러나 대길도 시청자도 한 동안 그렇게 목 놓아 울고만 싶은데, 갑자기 빨간 오라가 대길의 목에 던져진다. 아직 언년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경식 일파가 원손의 행방을 찾기 위해 대길까지도 잡아들인 것이다.

예고에 의하면, 두 사람은 결국 교형(絞刑)에 처해질 처지에 놓이게 되는데, 적어도 이 둘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예고처럼 천지호가 구해주는 것인지 아니면 노비당이 실행할 지는 아직 알 수 없을 뿐이다. 아무튼 죽음의 목전까지 동행했던 대길과 태하가 공동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전격적인 화해까지는 성급하더라도 최소한 적대관계만은 풀고 그들을 구해준 누군가와 힘을 모을 것이다.

그렇게 그들이 복수를 위해서건, 대의를 위해서건 추노가 아닌 추반(推班)의 방향으로 선회할 앞으로의 전개를 통해 비로소 곽정환 감독이 한성별곡에서 다 말하지 못한, 아니 많은 사람에게 전하지 못한 그의 목소리를 들려줄 것이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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