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이 나열하는 것이 의미 없을 정도로 추노의 장점과 매력은 이미 누누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무리수와 억지가 자주 등장하면서부터 칭찬 일변도의 추노에 대해 비판의 말들이 많아졌다. 작품의 완성도만은 거의 보장받다시피 한 곽정환 감독의 사극터치에 대한 기대감은 소소한 잘못과 과욕을 모두 덮어줄 수 있었다. 회를 거듭할수록 사람들은 추노에 열광하게 되었고, 언년이 논란에도 불구하고 추노는 점점 더 명작의 평가에 다가갔다.

그런 추노의 위기가 다가왔다. 추노의 비상과 추락이 갈린 것은 제주도부터였다. 개연성 없는 살인의 연속, 느닷없는 송태하와 언년의 애정행각 등 그때까지 시청자들을 포박했던 치밀하고 촘촘한 전개가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단지 그것만이 다가 아니었다. 이어서 반란을 도모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송태하는 제주도 절벽 위의 키스보다 더 황당한 결혼을 서두르고, 뒤늦게 친절해진 감독은 잦은 회상신으로 케릭터들의 성장을 중단시켰다.

최근 들어 추노가 기대와 열광에서 실망과 냉소로 변질되는 과정은 지적된 것들보다도 드라마 자체의 정체가 더 큰 문제이다. 15회를 빼놓고 보더라도 주요 인물들의 발전이 없다. 훈련원 마방을 탈출해 원손을 구하기 위해 제주도로 가는 송태하와 그를 쫓는 대길패와 황철웅. 이들의 변화 외에 나머지 인물들은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아니면 모두 죽여 버렸다. 단적인 예로 백호가 그렇다. 분명 언년과의 어떤 이야기가 있을 법한 인물인데, 상당히 허무하게 죽여 버렸다.

그 허무함의 끝은 최장군의 죽음 혹은 패배였다. 앞서 백호의 죽음에도 무사에 대한 예의가 없다고 불평한 적이 있었지만, 무협액션 드라마치고 무사에 대한 이해가 너무 없었다. 제주도에서 송태하에게 패한 이후 갑작스레 황철웅이 무적이 된 것도 모자라 결투 중에 갑자기 왕손을 안고 절규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막장 설정의 끝이었다. 무사가 아니라 동네 건달도 결투 중에 적에게 등을 돌리고 나 죽여 줍쇼 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최장군 케릭터에 대한 멸시이자 시청자를 분노케 하는 무례함의 소치이다. 대길과 함께 추노꾼 짓을 하고 살지만 그는 어엿한 무관을 꿈꾸었던 사람이다. 저자의 왈짜출신이 아니다. 그런 그가 아무리 아우에 대한 애정이 치민다고 하더라도 싸움 중에 갑자기 자살 충동에 사로잡히지 않는 한 원수의 목전에서 무방비 상태로 울부짖는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건 있을 수 없는 행동이다.

무사에게 자기의 목숨은 단지 삶에 대한 인간의 본능을 떠나 승부를 위한 전제이기에 무엇보다 중요하다. 손발이 베이고, 내장이 상하더라도 끝까지 칼을 휘두르는 무사의 목적은 삶이 아니라 승부에 있다. 그런 무사 최장군이 왕손을 발견했다고 모든 경계도 풀어버리고, 적의 존재를 망각한 채 울부짖는 것은 무사로서 자기 자신을 능멸하는 것이고 상대를 무시하는 반무사적 태도이다. 궁극적으로 시청자를 무시하는 태도였다.

이런 설정은 만화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추노 스스로 명작에서 삼류로 전락하는 자살행위였다. 이렇게 최장군을 바보로 만든 제작진은 무식한데다 무례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제작진의 악수는 반전을 모르고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렇게 허무하게 최장군을 처리하고, 현장에 나타난 대길이 느닷없이 송태하의 이름을 부른다. 그 순간 황철웅은 이이제이의 전술을 생각하게 된다는 것인데, 만일 그렇다면 대길은 곧바로 서원으로 달려갔어야 옳았다.

밤새 최장군을 찾아다녔다고 들짐승 대길이 보름 안 잔 사람처럼 설화 앞에서 골아떨어지는 것까지는 이해한다손치더라도 송태하의 편지를 보자마자 뛰쳐나가서 또 다시 서원으로 가지 않고 갑자기 외딴 산등성이에서 불까지 피워 언년의 초상을 불태우고, 최장군의 비녀를 자신의 머리에 꽂는다. 물론, 원손을 보고 언년의 자식으로 착각한 끝에 10년의 사랑을 접어야 했던 대길이 언년에게 나타나기 위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편지를 보고 당장이라도 송태하와 일전을 벌일 것처럼 달려간 대길이 불까지 피워놓고 엄숙한 의식을 치룬 것은 지나치게 한가한 모습이었다. 차라리 달려가지나 말던가. 그렇게 해서 서로가 피할 수밖에 없었던 대길과 언년의 재회가 이루어졌다. 엇갈린 운명 앞에 차마 하지 못할 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대길은 주종과 양천(良賤)을 말하는데, 엄숙한 표정의 언년은 반상(班常)을 거론한다.

언년을 허난설헌쯤으로 만들 생각이었다면 적어도 상대의 말을 알아듣고 맞는 대답을 하게끔 해야 했다. 반상과 양천은 얼핏 같은 개념인 것 같아도 엄격히 구분되는 것이다. 반상의 상은 속된 말로 상놈의 뜻이 아니라 평민을 가리킨다. 사소한 실수에 불과하지만 추노의 대전환이 이루어질 3자 대면이었다는 점에서 쉼표 하나라도 세심한 신경을 썼어야 했다.

14회까지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등장했지만 결국 추노의 긴장감은 대길과 언년의 재회에 의해서 조절되었다. 마주칠 듯 엇갈리고, 만나야 하나 말아야 하나의 갈등을 함께 고민하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길과 언년의 만남은 추노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전환점이 되는 것이다.

암살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 업복, 짝귀로 예상되는 인물의 등장과 이미 황철웅에게 대부분 죽은 태하의 부하들 그리고 원손을 빼돌린 조선비 등 몇 가지 단서들이 그 전환을 암시한다. 추노 15회가 이토록 막장이 된 까닭은 전환 때문일 것이라 짐작된다. 대길, 철웅, 태하의 다소 지리 했던 추격전에서 본격적으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전개로 넘어가기 위한 번민의 선택이었다고 보여 진다. 다만 아이디어가 고갈됐을 뿐이었다.

15회의 악수를 너그러이 잊는다면 앞으로의 전개가 진정 추노의 본격 주제에 접근하는 것이 될 듯하다. 그가 짝귀가 맞는다면 더 이상 숨겨진 인물이 없는 추노는 일그러진 시대의 모순에 도전하는 열혈남아들의 피와 눈물에 집중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 측면에서 아직 추노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은 유효하다. 다만 앞으로는 적어도 죽음에 대해서 혹은 절망에 대해서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와 개연성을 담보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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