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19일 <PD수첩>은 ‘아이돌 전성시대, 연습생의 눈물’이란 제목의 방송을 냈다. 세월호 관련 아이템을 냈지만 묵살됐기 때문이다. 타 방송사들은 당일 세월호 참사 관련 방송을 냈다. 창피했다. 이름을 걸고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을 만큼 제작 자율성을 확보하고 싶다”

[미디어스=이준상 기자] 24일 오전 10시 30분 상암 MBC사옥 앞 기자회견에서 MBC<PD수첩> 조윤미 PD가 자신의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 한 말이다. <PD수첩> 소속 PD 11명 중 10명은 지난 21일 제작중단을 결정하고 ‘제작 자율성’ 확보를 위한 싸움에 나섰다. 사측이 제작진에게 징계를 단행할 가능성이 높지만, 그동안 숱한 제작 자율성 침해를 받아왔던 이들은 한마음으로 뭉쳤다.

<PD수첩> PD들(강효임, 김현기, 서정문, 소형준, 이영백, 전준영, 조윤미, 최원준, 황순규)은 이날 기자회견 열고, 사측에 ▲제작자율성 보장 ▲제작중단 사태의 원인 조창호 시사제작국장과 김도인 편성제작본부장의 사퇴를 요구했다. 제작 간부들이 PD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25일 예정된 방송은 불방될 것으로 보인다.

MBC 소속 PD들이 24일 오전 10시 30분 상암 MBC사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최근 대법원에서 실형 확정 판결을 받은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의 이야기를 고리로, 한국사회의 노동 문제를 다루려고 했으나, 해당 아이템이 MBC 제작간부에 의해 가로막히자 지난 21일부로 제작중단에 돌입했다.

<PD수첩> PD들에 따르면 제작진은 다음달 1일 방송에서 <한상균은 왜 감옥에 있는가>라는 제목의 아이템을 다루겠다며 조창호 시사제작국장에게 지난 15일 아이템을 제출했지만 거부당했다. 제작진은 이후 다시 <한상균을 향한 두 개의 시선>이란 제목으로 바꿔, 제작 허가를 요청했지만 이 또한 묵살됐다.

최근 대법원에서 실형 확정 판결을 받은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의 얘기를 고리로 삼아, 한국의 노동 문제를 취재하려던 기획이었지만 조 국장의 생각은 달랐다. 조 국장은 지난 21일 PD들과의 면담자리에서 ‘민주노총 소속 언론노조 MBC본부의 소속 조합원이 관련 아이템을 다루면 일방적으로 한 축의 의견을 전하거나 아이템이 오도될 수 있다’고 주장했고, ‘당신들의 수장(한상균 위원장)을 감옥에서 꺼내기 위해 이 아이템을 제작하는 건, 방송법 위반’이라고 반발했다.

김현기 PD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노조 조합원으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피디로서 양심과 상식에 맞게 그리고 사실에 근거해 제작하고, 방송한다”며 “제작 과정에서 충분히 논의하거나 시사를 통해 의견을 전달하는 등 사후 프로그램의 중심을 잡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버리고, 아이템 단계에서 조합원이란 이유로 아이템을 묵살하는 건, 노조 편향적 국장의 잘못된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송일준 MBC PD협회장은 “PD·기자들은 노동자이지만, 제작·보도를 할 때 노동자로서 하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독립적인 언론인으로서 자율적인 판단 아래 제작·보도를 한다”면서 “하지만 간부들이 노골적으로 아이템을 묵살하자, 한계에 이른 PD들이 제작 중단을 거부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PD수첩>은 1990년 만들어져 MBC의 상징이었고, 공영방송의 역할을 다해온 프로그램”이라며 “징계를 감내하고 추락한 공영방송을 되살리겠다는 PD들의 행동에 지지와 성원을 보내달라”고 촉구했다.

제작진들은 이날 2012년 170일 파업 이후 <PD수첩>에서 발생한 제작 자율성 침해의 대표적인 사례들을 꼽아 배포하기도 했다. 조윤미 PD는 “그동안 <PD수첩>에서 세월호, 노동조합, 국정원, 청와대, 사드는 금기어였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PD수첩> 제작진이 밝힌 '제작 자율성 침해의 대표 사례' 중 일부분이다.

MBC(사진=MBC 홈페이지 화면 캡쳐)

2014년 4월 <세월호>, “유가족 우는 장면을 삭제하라”

세월호 침몰 6일째가 되던 2014년 4월 22일, 세월호 방송을 몇 시간 앞두고 최종 편집에 몰두하던 당시 제작진에게 “유가족이 우는 장면을 최대한 삭제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제작진은 “장례식장에서 유가족이 우는 걸 빼라면 어떡하냐”며 저항했지만 팀장 지시 이후 몇 장면이 삭제됐다.

2015년 7월 <국정원의 민간인 해킹 의혹>, 금기어가 된 ‘국정원’

국정원이 이탈리아의 인터넷 감시프로그램 제작 업체인 '해킹팀'에게 해킹 프로그램을 구입한 사건이 언론에 보도됐다. 천안함 폭침에 의문을 제기한 학자, 삼성 갤럭시 신제품과 안랩V3 등을 해킹할 수 있는지 문의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국정원이 대북용이 아닌 민간인을 사찰하려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정국을 뜨겁게 달궜다. 제작진은 해당 아이템을 발제했지만 ‘국정원을 다루는 것은 팀의 안위를 위해 좋을 것이 없다’는 답변을 듣고, 아이템이 불허됐다.

2015년 12월 <백남기 농민 관련 취재>, “백분토론에서 방송 하니 PD수첩에서 할 필요 없다”

백남기 농민이 경찰이 사용한 물대포를 맞고 뇌출혈로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제작진이 아이템을 발제했지만 “(같은 시사제작국 프로그램인) 백분토론에서 민중총궐기 당시의 이슈들을 점검할 예정이니 굳이 PD수첩에서 다룰 필요가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당시 백분토론 제목은 경찰의 무리한 진압에 대한 내용이 아닌 ‘복면시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였다.

2016년 12월 20일 <국정농단의 숨은 배후, 김기춘과 우병우>

국정농단이 하나둘씩 밝혀지던 시기, 박근혜 전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었던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우병우 민정수석에게 관심이 모아졌다. 김기춘의 경우 대표적인 공안검사 출신으로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조작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고 판단한 제작진은 관련 아이템을 제출했다. 그러나 국장은 방송 ‘전체 내용에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김기춘의 간첩조작사건 부분을 대폭 축소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간첩으로 몰려 수년간 감옥살이를 했던 피해자들의 고통스런 증언들이 있었으나 상당 부분 삭제되어 방송됐다.

2017년 1월 10일 <최초증언! ‘김영재 실’의 비밀>, “박대통령 얼굴 많이 쓰지 말라”

박근혜 전 대통령 비선의료 시술에 대해 주요 정황을 포착해 방송했다. 해당 방송을 준비할 당시 방송에 박 대통령 얼굴 사진을 많이 쓰지 말 것을 요구했다.

2017년 2월 21일 <탄핵, 불붙은 여론전쟁>

탄핵정국이 한창일 때, 탄핵반대쪽의 일부 참석자들은 금품을 받고 집회에 참석했다. 탄핵반대집회에는 ‘계엄령을 발포하라’라는 과격한 구호가 등장하기도 했으며, 태극기봉으로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찌르거나 구타하는 일도 빈번했다. 이런 모습이 카메라에 담기자 국장은 내용이 전반적으로 편향됐다며 크게 화를 냈고 “이대로는 방송 불가”라고 말했다. 당시 탄핵 여론조사를 보면 탄핵 ‘찬성’ 여론이 시종일관 압도적인 수준으로 높았으나 국장은 찬반입장의 기계적 중립을 요구했다. 기계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내용이 수정됐고, 방송하는 당일 날 아침 두 번째 시사를 받았다.

2017년 4월 <세월호, 101분의 기록>, “‘청와대’를 삭제하라”

지난 4월,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고 나서야 세월호를 취재할 수 있게 됐다. <세월호, 101분의 기록> 편이다. 그러나 이 방송을 제작하는 과정에서도 검열은 이어졌다. 시사제작국장은 ‘국가’와 ‘청와대’라는 말을 삭제하라 지시했다. 내레이션에서 ‘국가’를 삭제하라고 압박하며 시사제작국장은 ‘제작진이나 국민들이 세월호 사건에 대해 국가 탓만 해서는 안 되고 우리 모두의 문제로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세월호 사고 직후 국가안보실과 해경 본청과의 통화 내용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국가안보실이 청와대 소속이 확실하냐’고 물으며 청와대를 뺄 것을 집요하게 강요했다.

2017년 7월 11일 <4대강, 22조는 어디로>, “살아있는 권력 좀 물어 뜯어라”

시사제작국장은 사대강 사업의 장점에 대해서도 충분히 부각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박원순 시장과 이낙연 총리의 예를 들며 정치적 논리로 사대강 사업을 방어하려했다. “박원순 시장도 보 철거 안했다, 이낙연 총리도 인정했다”. 국장은 또한 시사 중 “죽은 권력 좀 그만 물어뜯고 살아 있는 권력 좀 물어뜯어라”고 말했다. 해당 방송을 하면서 국장과 언쟁을 벌였던 담당PD는 <4대강> 방송 직후 다른 부서로 인사발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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