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건 정국이라고 해야 할 모양이다. 청와대에서 자꾸 이전 정부 관계자들이 작성한 문건들이 발견되면서 ‘사정정국’이 조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언론과 자유한국당은 ‘정치 보복 프레임’을 키워 상황을 왜곡하려 들지만 생각대로 될지는 의문이다.

청와대는 17일 정무수석비서관실에서 총 1361건의 이전 정부 문건들을 발견한 사실을 공개한 바 있다. 또 청와대는 17~18일 내부 사무실을 전수조사한 결과 국가안보실과 국정상황실 등의 캐비닛 3개에서 박근혜 정부 문건을 다량 발견했다. 이전에 발견된 것까지 포함해서 이 문건들의 분석 결과는 주말께 공개될 전망이다.

언론을 통해 전해진 문건들의 대략적인 내용은 그야말로 심각한 수준으로 보인다. JTBC는 18일 박근혜 정부 청와대가 비서실장 주재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세월호 특조위 무력화 지시를 내린 사실이 청와대가 정무수석비서관실에서 발견한 문건 내용을 통해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언론과 협조해 일탈행위 등을 부각시키라는 등의 구체적 지시까지 나온다고 한다.

그렇잖아도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을 역임했던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 등이 문화계 블랙리스트 관련 건 등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때다. 이런 상황에서 문건 내용의 공개는 박근혜 정부의 비정상적인 청와대 운영 방식에 상당한 비판 여론을 불러일으킬 걸로 보인다.

청와대 박수현 대변인이 14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과거 정부 민정수석실 자료를 캐비닛에서 발견했다고 밝히며 공개한 고(故) 김영한 민정수석의 자필 메모로 보이는 문건. (연합뉴스)

과거 정부를 창출한 당사자인 자유한국당은 청와대의 문건 내용 공개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18일 페이스북에 “박근혜 정권의 국정 실패를 빌미로 어부지리로 정권을 잡은 문재인 정권이 작성자 불명의 서류 뭉치를 들고 생방송 중계리에 국민 상대로 선전전을 벌인다”, “5년마다 반복되는 정치 보복 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나 보다”라고 썼다. 정우택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도 이날 의원총회에서 청와대의 행보를 “사법부 재판에 개입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규정했다.

청와대의 문건 내용 공개에 대해서는 국회 법사위에서도 논란이 벌어졌다.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일부 야당들은 국가기록원에 이관되지 않은 기록물은 이관조치를 하는 게 우선이라며 청와대가 임의로 검찰에 문건을 전달한 것은 법적 근거가 없는 처분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여당은 청와대에서 발견된 문건들은 대통령 지정기록물에 해당하지 않고 공적 목적으로 원본이 아닌 사본을 검찰에 넘긴 것이므로 문제가 없다고 맞섰다.

이런 지적을 내놓는 것에는 보수언론도 발을 함께 맞추고 있다. 청와대가 문건 내용을 공개한 당일부터 ‘정치 보복 프레임’을 제기해 온 보수언론은 19일 지면에서도 같은 주장을 반복했다. 이 중 가장 분명한 주장을 실은 것은 동아일보다. 동아일보는 문병기 기자 명의 칼럼을 통해 청와대의 문건을 활용한 사정정국 조성 때문에 ‘백지 인수인계’의 잘못된 관행을 고칠 기회를 놓치게 됐다고 지적하고 있다.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애초에 박근혜 정권이 문서 관리를 엉망으로 한 게 이런 상황의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일부 야당들의 주장은 해당 문건들 중에 대통령지정기록물이 포함됐을 가능성을 근거로 한다,

그러나 오히려 그 문건들이 청와대에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 해당 문건들이 대통령지정기록이 아님을 보여주는 걸로 해석할 수도 있다. 대통령지정기록을 정하는 것은 박근혜 정권의 할 일이지 문재인 정권의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모든 혼란은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가 무슨 의도로 이러한 문건을 국가기록원으로 이관하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데에서 시작된다. 이런 상황인데도 현 정권의 청와대가 알아서 해당 문건들을 국가기록원으로 이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도하다.

이런 면에서 보면 동아일보의 칼럼 주장도 비합리적이다. ‘백지 인수인계’의 잘못된 관행은 정권이 청와대를 원칙에 맞게 운영하고 기록물 관리를 제대로 할 때에야 비로소 시정될 수 있다. 이런 상황이 전제되면 새로 들어서는 정권이 기록물을 갖고 보복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게 된다. 애초에 이게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의 취지다. 그래서 지금 사태의 원인은 박근혜 정권이 청와대를 음모적인 정치공작으로 운영하면서 기록물 관리까지 제대로 하지 않은 것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지난 6월 29일 청와대 여민2관 3층 계단 입구에서 직원들이 지난 정부에서 만든 문서 검색대를 철거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유한국당과 보수언론이 이 점은 외면하고 그야말로 ‘알레르기’에 가까운 반응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문재인 정부가 박근혜 정권 뿐 만이 아니라 이명박 정권의 문제까지 겨냥할 태세를 보이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단적인 예를 들면 홍준표 대표의 태도다. 홍준표 대표는 지난 12일 국가정보원이 적폐청산 태스크포스를 꾸려 13개 사건을 재조사하기로 한 것에 대해 “"과거 사건을 미화하고 조작하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라며 “검찰을 사후통제하고 감독하는 게 국정원이라는 것을 이 정부 들어와서 처음 봤다. 검찰 수사를 재수사한다는 것인데 국정원에 그런 기능이 없다”고 주장했다.

국정원이 정치공작을 자신들의 존재 이유처럼 여기기 시작한 것은 이명박 정부부터다. JTBC는 17일 2012년 대통령 선거 당시 국정원의 선거 개입 정황이 담긴 문건을 검찰이 확보 했으나 박근혜 정부에 이 문건을 반납했다고 보도한데 이어 18일에는 이 문건에 2011년 10월 서울시장 재보선 대책 문건도 들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이는 세계일보가 지난 10일 ‘국정원 SNS 장악 보고 문건’ 등을 보도한 것과도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현재 청와대가 문건 내용을 공개하면서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이전 정권이 언론을 통해 국내 여론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언론’이란 결국 보수언론을 가리킬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권이 조성하는 사정정국의 칼날이 박근혜 정권, 이명박 정권, 보수언론을 모두 겨냥하는 듯한 상황인 셈이다.

보수언론의 필두에 선 조선일보는 19일 사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반부패기관협의회 복원을 지시하고 국정원장, 검찰총장, 감사원장 등을 참여시키기로 한 것을 비판하면서 “정말 부패를 줄이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검찰과 경찰, 국세청에 대해 대통령과 정권이 일절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이들 기관은 죽은 권력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권력부터 조사할 것이고 국가 기강은 그때부터 잡힌다”고 주장했다.

검찰을 간섭하지 않기로 했더니 살아 있는 권력부터 건드렸다는 것은 이미 참여정부의 사례를 통해 경험했다. 당시 죽은 상태였던 권력은 2007년 대선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물론 조선일보의 주장은 이 사례를 반복하라는 이야기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런 주장을 내놓을 입장이 되는 것인지는 앞으로 추가 공개될 청와대 문건의 내용을 보아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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