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만든 사람이 보여준 행보가 영화적 서사를 넘어섰을 때, 그가 만든 작품에 대한 평가는 어렵다. 특히나 그 영화가 현실에서 그가 봉착한 질문과 연관될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영화 <그 후>를 보니 오히려 그런 영화를 만든 이의 행보가, 또 하나의 등장하지 않은 등장인물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담론을 두텁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감독 홍상수의 행보로 인해, <그 후>의 이야기는 평범한 가정의 이야기를 넘어선다.

사랑은 질병과도 같다. 누군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질병이 예고도 없이 우리 몸을 침공하듯이 사랑도 그러하다. 거기엔 '제도'도 '처지'도 '존재'도 무기력하다. 결국 남겨지는 것은 그 사랑에 임하는 자의 '자세'이고 '선택'이다. 자유로운 싱글들이야 '사랑무한주의'겠지만, 만약에 그 '사랑의 질병'에 걸린 존재가 이미 그 누군가의 파트너로 공인된 사람이라면?

질병과도 같은 사랑에 빠진 남자, 그 후

영화 <그 후> 포스터

영화 <그 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우리는 이런 '인간 감정의 불가피성'에 대한 전제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이 최근 지탄받고 있는 홍상수 감독의 행보에 대한 '용인'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질병에 걸린 '인간에 대한 질문'이라는 것이 정확하다 할 것이다. 일찍이 홍상수 감독의 작품을 보아왔던 사람이라면, 영화 속 등장인물인 유부남 감독의 '바람기'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거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남자들은 여자라면 환장을 했고,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인 듯 갖은 해프닝을 벌이며 구질구질하게 굴었다. 그리고 그걸 홍상수 감독은 '인간'이라 정의하곤 했다.

하지만 그저 만든 이의 입장에서 바람기 다분한 남자 인간을 정의하는 것과, 이제 그 자신이 스스로 '실천(?)'해 보인 입장에서 그의 주장은 궤를 달리한다. 그래서일까. 그후 그의 이야기들은 발정이라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은 해프닝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 '사건'으로 빠져든다. 2016년 김민희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유부남과 사귄 여성의 이야기를 그려냈다면, 이제 2017년 <그 후>는 그 반대편의 '유부남'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는 평론가이자 작은 출판사 사장인 봉완(권해효 분)의 뜻하지 않은 사랑, 혹은 바람으로 벌어진 그의 처지에서 시작된다. 잠도 못 이루고 입맛도 없으며 달려도 시원하지 않는 그 질병을 그는 그만 아내에게 들키고 만다. 그리고 그를 사랑했던 그녀도 가정도 자신과의 풋사랑도 놓지 않는 그의 '비겁한' 행보에 그의 곁을 떠나고 만다. 그 가운데 새롭게 출판사의 직원으로 등장한 아름(김민희 분). 그녀와의 첫 식사 자리는 뜻하지 않은 '실존적 논쟁'으로 이어진다.

왜 사느냐고 묻는 당돌한 아름, 그런 그녀에게 봉완은 그 질문 자체를 부정한다. 삶이란 실체를 몇 마디의 말로 정의내릴 수 있냐고. 그런 그에게 아름은 그런 정의의 회피가 또 하나의 비겁함 아니겠냐고 반박한다. 장황한 두 사람의 논쟁, 이 장면은 하지만 상징적이다. 아름의 구구절절 몇 가지 존재의 정의를 차치하고, 그 삶의 실체에 대한 정의는 곧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결혼이라든가 가정이라든가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상징하는 듯 보인다.

우리는 왜 결혼을 하는가, 그리고 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가. 결혼할 당시에는 분명한 것 같은 결정과 선택이 해를 거듭할수록 불명확해지고 모호해진다. 봉완이 답을 애써 피하듯, 오히려 답을 말하고 나면 낯부끄러워지는 상황이 되는 지경에 이른다. 아니, 몇 마디의 정의로 퉁치기엔 이 사회에서 남자와 여자가 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이유는 너무도 다양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영화 <그 후> 스틸 이미지

그렇게 답을 피해간 봉완은, 그가 맞닥뜨린 상황에서도 그렇다. “당신 바람피우니?”라는 아내의 질문에 대해서도, 비겁하다며 그의 곁을 떠나간 출판사 여직원에 대해서도, 그는 하냥 그 상황의 바깥에 서있다. 심지어 돌아온 그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그녀를 다시 안고, 그녀의 뜻대로 아름을 내쫓고, 그녀의 뜻대로 아름을 이용하는 상황에 그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출판사에 쳐들어온 아내에게 그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아니야'다. 그녀를 끌고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 포옹을 하던 그 유일한 적극적 행위 외에 봉완의 태도는 늘 수동적이고 자기 보호적이며 자기중심적이다. 홍상수 영화 속 남자들이 대부분 그래왔듯이 편의적이다.

뜻밖에도 그런 봉완이 적극적이었던 지점은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찾아온 아름과의 대화 속에서 드러난다. 돌아온 출판사 직원의 책략대로 아름을 핑계로 양다리를 자연스럽게 하려고 들어갔던 가정에서 봉완은 뛰쳐나와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 한동안 지냈단다. 하지만 늦은 시간 아내가 딸아이를 잘 차려 입히고 찾아오자 봉완은 뒤도 안 돌아보고 가정을 택하고, 그의 사랑인지 바람인지는 거기서 마무리된다. 다시 찾아온 아름은 봉완이 한결 편해 보인다고 말한다. 그러자 봉완은 그렇게 풋사랑이 마무리되자 마치 보상처럼 상도 받았다며 헛헛하게 말한다. 편해진 남자, 그가 겪은 '사랑'의 질병을 영화는 그렇게 표현한다.

영화 그 이상의 질문, 홍상수

하지만 관객들은 그런 봉완의 결정으로 생각을 멈출 수 없다. 왜냐하면 영화 속 주인공인 봉완이 그 잠시의 사랑을 '바람'으로 마무리한 것과 달리, 감독 홍상수는 다른 결정을 내렸으니까. 오히려 영화의 질문은 거기서 시작된다. 감독 홍상수가 내린 결정과 영화 속 주인공 봉완의 결정 사이에서. 심지어 홍상수 감독도 봉완과 다른 결정을 내렸음에도 상을 받았다(물론 여주인공이었던 김민희가 받은 상이지만). 하지만 그 상이 무색하게 그와 그녀는 대한민국에서 '욕'을 먹는다. 다른 선택이 낳은 다른 결과다.

영화 <그 후> 스틸 이미지

영화 속 봉완은 이제는 편하게 가정을 위해 살아갈 거라고 말한다. 그 봉완의 말은, 어쩌면 홍상수 감독이 그런 편한 종결점으로 가는 여정 속에 있다는 말일 수도 있다. 혹은 마치 늘그막에 노인정에서 사랑을 위해 머리끄덩이 잡기를 마다하지 않은 그 상황처럼, 아이도 다 성장한 내 인생 마지막의 사랑을 위한 장렬한 최후의 헌신이라는 자기변명이 숨어있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영화 속 아직 어린 딸아이를 위해 집으로 돌아왔던 봉완이 젊은 날 홍상수 감독일 수도.

마치 자신들을 부도덕하다 손가락질하는 세상을 위한 서비스컷처럼, 출판사에 찾아온 아내에 의해 아름으로 분한 김민희에게 퍼부어진 통렬한 따귀 세례처럼 영화 <그 후> 자체가 홍상수 감독이 어리석은 결정을 내린 자기 자신에게 준 '따귀' 세례일 수도 있겠다. 아니 그 반대로 제도로서의 결혼, 자신보다는 가정을 위한 희생 대신 여전히 자신을 놓을 수 없는 자기중심적인 감독의 변호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관객들은 <그 후>를 통해 감독과 다른 이율배반적인 영화적 서사를 통해 다양한 생각의 갈래를 펼쳐나간다. 바로 이 지점이 영화 <그 후>가 서있는 곳이다.

이 모든 가능태들을 통해 마음을 열어 도달하는 곳은 다시 처음, 그 '실체'에 대한 질문이다. 존재하지만 쉬이 답할 수 없는, 제도로서의 결혼과 가정이라는. 하지만 변덕스러운 인간을 다 품어낼 수 없는 아이러니한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질문. 구구절절 변명 대신, 가능할 수 있는 수많은 질문을 품고 돌아온 홍상수는 그래서 그가 내린 부도덕한 결정과 달리, 여전히 그가 해왔던 수많은 작품들처럼 유의미하다.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실존적으로 터놓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희귀한 감독으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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