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3년 동안 한국 뮤지컬 무대를 보면 ‘오! 캐롤’처럼 뮤지컬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선호하기보다는 ‘도리안 그레이’나 ‘보디가드’,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처럼 타 장르의 원작을 무대화하는 원 소스 멀티 유즈의 경향을 보인다. ‘시라노’ 역시 그 트렌드 가운데 하나다. 신작 뮤지컬을 제작하거나 수입하는 데 있어 원 소스 멀티 유즈를 선호하는 이러한 경향은 새로운 뮤지컬 플롯을 도입하는 데 따르는 흥행적인 부감을 제작사가 버거워한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시라노’는 외모 콤플렉스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에게 사랑한다고 고백을 하지 못하는 열혈남아 시라노의 슬픈 사랑이야기다. 여성 관객이 선호할 만한 플롯 가운데에는 남녀가 사랑의 방해물을 뚫고 진정한 사랑에 골인하는 이야기와 더불어 ‘두 도시 이야기’처럼 이루지 못한 순애보적 사랑도 포함하는데 ‘시라노’는 후자의 플롯으로 여심에 호소하는 뮤지컬이다. 한 여자를 주인공과 친구가 동시에 사랑하는데, 유별나게 큰 코로 말미암아 사랑한다는 고백은 차마 하지 못하고 친구를 위해 연애편지를 대필하는 순애보 말이다.

뮤지컬 <시라노> ⒸRG, CJ E&M)

시라노의 친구 크리스티앙은 시라노의 필력이 아니고서는 록산의 심금을 울리지 못하는, 사랑의 언어가 결여된 시라노의 아바타다. 이는 1막에서 낭송회가 끝나고 록산과 크리스티앙이 만났을 때 편지에서 록산을 유혹하던 사랑의 필체가 실제 크리스티앙의 육성에서는 멸종하고 만, 크리스티앙의 언어적인 빈약함이 드러난다. 록산의 심장을 동요할 만한 사랑의 언어가 조악한 이가 크리스티앙이라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해서 뮤지컬은 친구 시라노의 도움을 받아 록산과의 사랑에 골인하는 크리스티앙을 마냥 ‘무임승차’ 해대는 캐릭터로만 묘사하고 있지만은 않다. 2막에서 크리스티앙은 시라노의 대필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아분열을 겪는 솔직한 남성으로 묘사된다.

이는 크리스티앙이 대필이라는 거짓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 보여줌과 동시에, 대필이라는 거짓을 사랑하는 여자 록산에게 솔직하게 밝히고 크리스티앙의 진짜 모습-시라노가 대필해주는 허수아비 크리스티앙이 아니라 감미로운 언어에 서툰 남자의 모습이라 해도 록산이 사랑해줄 것인가를 궁금해 하는 크리스티앙의 순수성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만일 이 작품이 다시 무대화된다면 크리스티앙의 이런 솔직한 면모를 연출이 보다 극대화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뮤지컬 ‘시라노’에 있어 극적인 장면이다.

뮤지컬 <시라노> ⒸRG, CJ E&M)

2막에서 편지의 장본인이 크리스티앙이 아니라 시라노 본인임이 밝혀지는 시라노와 록산의 하모니는 관객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한평생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사랑을 꽁꽁 숨겨온 시라노의 진면모가 드러나는 2막 후반부. 노래로 호소하는 뮤지컬 장르적인 특성이 여심의 감정적인 진폭을 깊숙하게 건드릴 수 있는 파급력이 있기에, 표정 연기와 대사로만 전달하는 연극이나 영화보다 감정적인 울림에 있어 강점을 갖는다.

그럼에도 ‘시라노’는 장점만큼이나 단점도 확연하다. 외모 콤플렉스에 빠진 순정남의 짝사랑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까지 30분가량이나 지체되고 있다. 모든 일본 뮤지컬이 그런 건 아니지만 한국에 소개되는 최근 일련의 일본 뮤지컬은 본격적인 서사에 돌입하기까지 지나치게 뜸을 들인다는 단점이 눈에 띈다.

‘데스노트’에서 김준수가 연기한 엘이 무대에 등장하기까지 소요된 시간이 얼마만큼 길었나를 상기해 보라. 김준수의 등장을 기다리기까지 관객은 30분 이상을 목을 길게 빼고 기다려야만 했다. ‘시라노’ 역시 그런 맹점에서 피해갈 수 없다. 본격적인 서사가 진행되기 전까지 너무 뜸을 들이는 ‘시라노’의 맹점은, 아니 일본 뮤지컬의 약점은-‘넥스트 투 노멀’에서 다이애나의 눈에 어른거리는 아들 게이브가 실은 살아있는 아들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리기까지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 플롯과는 확연히 비교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뮤지컬 <시라노> ⒸRG, CJ E&M)

1막 초반 30분 동안에 무모하리만치 적을 만들어가는 시라노의 열혈남아적인 마초성을 묘사하기보다는, 대필 연애편지를 통해 록산을 향한 시라노의 감정이 얼마나 애절한가를 좀 더 일찍 시작했다면 시라노의 순애보가 두드러지는 더 나은 뮤지컬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시라노’의 이런 맹점은 프로듀서의 탓이 아니라는 건 짚고 넘어가야겠다. 이 뮤지컬이 ‘아이다’처럼 한국 제작진이 수정할 수 없는 ‘레플리카 뮤지컬’이 아니라 연출적인 수정이 가능한 ‘논 레플리카 뮤지컬’이기는 해도 각본까지 손을 볼 수는 없었다.

만일 각본까지 한국 제작진이 손볼 수 있었다면 배우 출신인 프로듀서가 ‘시라노’ 초반 30분 동안 벌어지는 원작의 중구난방 동선을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한 예로 1막 초반에 시라노가 첫 결투에서 승리할 때 앙상블이 왜 환호해야만 했을까. 시라노의 영웅성이 강화되기도 전인데 말이다. 뮤지컬에서의 선택과 집중을 배우 출신 프로듀서가 몰랐을 리 만무하다.

#김동완 #류정한 #홍광호 #시라노 #뮤지컬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