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기시감(데자뷰)이 드는 건 그나마 신문이나 잡지 속 사진으로 그 그림을 몇 번 스쳐봐서일 것이다. 아니면 그 화가가 예술적 모티프로 삼았다는 ‘진짜’ 만화의 잔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렁그렁 눈물 맺힌 그림 속 여성은 어려서 봤던 만화영화 속 원더우먼을 빼닮았다. 어쨌든 그림에다 작품이름, 화가이름까지 조합할 수 있게 됐으니, 평소 미술과 담쌓고 사는 나로선 누군가에게 깊이 감사할 일이다. 작품 한 점 값이 만화책으로 국립중앙도서관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임을 안 것이 더 큰 수확이기는 하지만.

▲ 중앙일보 11월29일자 11면.
얼마 전 시작된 어느 금융그룹의 TV 광고에는 “돈 버는 것이 최고의 예술”이라고 외치는 앤디 워홀이 등장한다. 리히텐슈타인과 앤디 워홀의 관계는 팝아트계의 아디다스와 나이키의 관계라고나 할까. 두 사람이 비슷한 시기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국의 TV 화면을 장식하고 있는 게 내 눈엔 그저 ‘띄엄띄엄’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지난 11월16일 <KBS1> 다큐멘터리 ‘예술의 반란’에서 소개된 그래피티 예술계의 살아있는 전설, 뱅크시가 다시 포개졌다. 뱅크시는 신발로 치면 영화 <살인의 추억>에 나오는 짝퉁 브랜드 ‘나이스’가 되겠다.

이들의 공통점은 반(反) 엄숙주의다. 팝아트가 미디어의 기법과 광고의 이미지를 미술로 불러들였다면, 그래피티는 캔버스와 화랑을 거리로 불러냈다. 양쪽 모두 근엄한 기존 미술(계)에 반기를 든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불러들인 것’과 ‘불러낸 것’의 차이는 크다. 앞의 두 사람은 이미 자본주의의 어릿광대가 되어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비자금으로 덧칠한 미술작품은 ‘돈=예술’의 등호관계를 표상한다. 반대로, 뱅크시는 자본주의를 공략하는 게릴라다. 그의 ‘낙서’에까지 돈질이 덤비고 있다고 하는데, 내 눈엔 자기 똥마저 음식으로 착각하는 비육견 류(類) 인간들의 게걸스런 퍼포먼스로밖엔 안 보인다.

주제넘게 미술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불가의 연기설에 기댈 것도 없이, 비슷한 시기에 이들이 (커밍아웃이건 아웃팅이건) 잇달아 TV에 등장한 것을 단순한 우연이 아닌 하나의 징후로 포착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하는 얘기다. 오늘날 왜 재벌총수 부인은 팝아트에 꽂히고, 왜 금융그룹은 팝아티스트를 동원하며, 여기서 뱅크시의 배역은 또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기호들의 문맥 위에 재배치해보자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도 TV가 해주면 좋으련만, TV는 나열할 뿐 꿸 줄 아는 능력(一以貫之)이 없다. 달리 바보상자가 아니다.)

팝아트는 대량복제를 전제하는 예술이다. 자본주의의 대량생산 양식을 끌어들였을 뿐 아니라, 원본부터가 이미 하나의 복제다.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연작은 원본 사진의 복제이면서, 아메바처럼 수없이 무성생식한 짝퉁의 계보이기도 하다. 고상한 원작 진품만 찾을 것 같은 재벌총수 부인이 여기서 찾으려는 건 짝퉁 중에서도 ‘진짜’ 짝퉁이다. 수없이 많은 짝퉁 가운데서 진짜 짝퉁을 갖는 건 몇 편의 위작을 솎아내고 원작 진품을 갖는 것보다 ‘경쟁률’ 차원에서 값어치 있는 선택일지 모른다. 무엇보다 형식과 내용 모두 너무나 자본친화적이어서 좋았을 수도 있겠다.

▲ 경향신문 2007년 3월26일자 22면.
‘예술로 부자되겠다’라고 하는 앤디 워홀의 메시지는 중의적으로 들린다. ‘예술마저 고상하지 않다’라고 읽을 수도 있고, 뒤집어 ‘돈도 고상하다’라고 읽을 수도 있겠지만, 물신숭배 사회에서는 당연히 후자다. 금융그룹이 “금융업계의 앤디 워홀이 되겠다”고 나선 건 예술가의 강력한 ‘상징권력’을 활용한 마케팅 전략이다. “앤디 워홀 만큼 고상하게 돈벼락을 안겨드리겠습니다.” 자본권력과 문화권력을 합친 2종 세트상품이다. 재벌총수 부인이 진짜 짝퉁을 구매함으로써 욕망의 폐쇄회로를 완성했다면, 금융그룹은 재벌총수 부인처럼 되고 싶어 하는 대중의 욕망을 들쑤셔 불러내고 있는 것이다.

발칙하게도 뱅크시는 이런 서사를 단숨에 우화로 바꿔 놓는다. 행차에 나선 임금은 투명 곤룡포를 걸친 채 으스대고, 뒤따르는 신하들은 자신의 조악한 심미안을 탓하며 조아리고, 잠적한 사기꾼 재봉사는 열심히 금화닢을 세고 있을 때, 행차를 지켜보던 소년 뱅크시는 외친다. “임금님은 벌거숭이잖아.” (뱅크시는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를 풍자한 작품을 실제로 만들었다.) 그런데 책 속 임금은 뒤늦게 자신의 스트리킹을 깨닫지만, 책 밖의 사정은 다르게 돌아가는 것 같다. “흠! 이 옷은 내 옷이 아니니라. 배달부의 옷이니라.”

▲ 뱅크시 작품.
하필 이런 때 대선이 코앞이다. 이번 대선을 희한한 선거라고들 한다. 숱한 비리가 드러나거나 비리 의혹을 받는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이 꿈쩍하지 않는 것을 이르는 얘기다. 이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프레임 선거’라는, 미국 정치마케팅에서 쓰이는 정치공학적 개념이 동원되고 있다. 이번 선거는 ‘경제 성장 프레임’이 지배하고 있어서 그렇다는 거다. 그러나 정치공학적으로는 프레임 선거인지 몰라도, 그 프레임의 파괴력은 앞에서 뒤적거려본 ‘상징권력’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다. 돈질도 얼마든지 고상할 수 있고, 더구나 그 돈이 흘러가서 꽂히는 짝퉁은 친근하기까지 하니, 심리적 동일시의 모든 조건이 갖춰진 것 아닌가.

일부 언론은 지금의 선거 양상을 개탄하지만, 난 정작 그 언론의 잘못이 크다고 본다. 그들에게 상징 싸움에 대처할 능력과 의지가 모두 없다는 게 문제다. 강남의 타워팰리스 주민과 그 옆에 붙어 있는 구룡마을 비닐하우스촌 주민을 하나로 부를 수 있는 실존적 호칭은 없다. 그런데도 언론은 선거 공간에서 양쪽을 한통속으로 ‘국민’이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국민’이 결코 허명은 아니다. 누군가를 포섭하고, 다른 누군가를 배제한다. “국민을 잘 살게 하겠다”는 이명박식 경제성장론에서 국민은 타워팰리스 주민이지 결코 구룡마을 주민일 수 없지만, 구룡마을 주민이 ‘국민’으로 호명될 때(조선 사람이 ‘황국신민’으로 호명될 때), 차별은 은폐되고 실존은 망각된다.

▲ 한나라당이 TV광고로 내보내고 있는 '욕쟁이 할머니'편.
물론, 지나치게 단순한 주장인 줄 안다. 이게 어디 다 언론 책임이겠는가. 또 선거는 유기체처럼 얼마나 복잡하게 작동하던가. 하지만 선거에 동원되고 유통되는 기호와 상징에 좀더 예민해지지 않으면 이번 대선은 끝까지 요령부득의 희한한 선거가 될지 모른다. 없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국밥과 애정어린 욕설을 한 데 말아주던 욕쟁이 할머니가 가진자를 대변하는 대통령 후보의 선거 캠페인을 하는 것도 그렇고, 심지어 그 욕쟁이 할머니가 (부분적으로) 짝퉁이었다는 것도 그렇다. 진짜, 짝퉁의 상징적 징후는 너무나 뚜렷하다. 다만 뱅크시의 출몰 시기가 오리무중일 뿐.

1993년 <한겨레>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해, 줄곧 사회부 쪽에서 일했다. 지금은, 사상 초유의 정파(停波) 사태를 겪고 눈물겨운 투쟁 끝에 새 방송을 시작하는 OBS경인TV에서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모든문제연구소장’을 자처하고 산다. ‘쿨하다’를 날씨 상태에 대한 표현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송진처럼 끈적한 386의 시대적 아비튀스에 갇혀 있지만, 일상의 억압에 관한 미시담론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려고 노력한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