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기시감(데자뷰)이 드는 건 그나마 신문이나 잡지 속 사진으로 그 그림을 몇 번 스쳐봐서일 것이다. 아니면 그 화가가 예술적 모티프로 삼았다는 ‘진짜’ 만화의 잔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렁그렁 눈물 맺힌 그림 속 여성은 어려서 봤던 만화영화 속 원더우먼을 빼닮았다. 어쨌든 그림에다 작품이름, 화가이름까지 조합할 수 있게 됐으니, 평소 미술과 담쌓고 사는 나로선 누군가에게 깊이 감사할 일이다. 작품 한 점 값이 만화책으로 국립중앙도서관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임을 안 것이 더 큰 수확이기는 하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반(反) 엄숙주의다. 팝아트가 미디어의 기법과 광고의 이미지를 미술로 불러들였다면, 그래피티는 캔버스와 화랑을 거리로 불러냈다. 양쪽 모두 근엄한 기존 미술(계)에 반기를 든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불러들인 것’과 ‘불러낸 것’의 차이는 크다. 앞의 두 사람은 이미 자본주의의 어릿광대가 되어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비자금으로 덧칠한 미술작품은 ‘돈=예술’의 등호관계를 표상한다. 반대로, 뱅크시는 자본주의를 공략하는 게릴라다. 그의 ‘낙서’에까지 돈질이 덤비고 있다고 하는데, 내 눈엔 자기 똥마저 음식으로 착각하는 비육견 류(類) 인간들의 게걸스런 퍼포먼스로밖엔 안 보인다.
주제넘게 미술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불가의 연기설에 기댈 것도 없이, 비슷한 시기에 이들이 (커밍아웃이건 아웃팅이건) 잇달아 TV에 등장한 것을 단순한 우연이 아닌 하나의 징후로 포착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하는 얘기다. 오늘날 왜 재벌총수 부인은 팝아트에 꽂히고, 왜 금융그룹은 팝아티스트를 동원하며, 여기서 뱅크시의 배역은 또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기호들의 문맥 위에 재배치해보자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도 TV가 해주면 좋으련만, TV는 나열할 뿐 꿸 줄 아는 능력(一以貫之)이 없다. 달리 바보상자가 아니다.)
팝아트는 대량복제를 전제하는 예술이다. 자본주의의 대량생산 양식을 끌어들였을 뿐 아니라, 원본부터가 이미 하나의 복제다.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연작은 원본 사진의 복제이면서, 아메바처럼 수없이 무성생식한 짝퉁의 계보이기도 하다. 고상한 원작 진품만 찾을 것 같은 재벌총수 부인이 여기서 찾으려는 건 짝퉁 중에서도 ‘진짜’ 짝퉁이다. 수없이 많은 짝퉁 가운데서 진짜 짝퉁을 갖는 건 몇 편의 위작을 솎아내고 원작 진품을 갖는 것보다 ‘경쟁률’ 차원에서 값어치 있는 선택일지 모른다. 무엇보다 형식과 내용 모두 너무나 자본친화적이어서 좋았을 수도 있겠다.
발칙하게도 뱅크시는 이런 서사를 단숨에 우화로 바꿔 놓는다. 행차에 나선 임금은 투명 곤룡포를 걸친 채 으스대고, 뒤따르는 신하들은 자신의 조악한 심미안을 탓하며 조아리고, 잠적한 사기꾼 재봉사는 열심히 금화닢을 세고 있을 때, 행차를 지켜보던 소년 뱅크시는 외친다. “임금님은 벌거숭이잖아.” (뱅크시는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를 풍자한 작품을 실제로 만들었다.) 그런데 책 속 임금은 뒤늦게 자신의 스트리킹을 깨닫지만, 책 밖의 사정은 다르게 돌아가는 것 같다. “흠! 이 옷은 내 옷이 아니니라. 배달부의 옷이니라.”
일부 언론은 지금의 선거 양상을 개탄하지만, 난 정작 그 언론의 잘못이 크다고 본다. 그들에게 상징 싸움에 대처할 능력과 의지가 모두 없다는 게 문제다. 강남의 타워팰리스 주민과 그 옆에 붙어 있는 구룡마을 비닐하우스촌 주민을 하나로 부를 수 있는 실존적 호칭은 없다. 그런데도 언론은 선거 공간에서 양쪽을 한통속으로 ‘국민’이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국민’이 결코 허명은 아니다. 누군가를 포섭하고, 다른 누군가를 배제한다. “국민을 잘 살게 하겠다”는 이명박식 경제성장론에서 국민은 타워팰리스 주민이지 결코 구룡마을 주민일 수 없지만, 구룡마을 주민이 ‘국민’으로 호명될 때(조선 사람이 ‘황국신민’으로 호명될 때), 차별은 은폐되고 실존은 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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