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태하 일행이 도착한 곳은 병산서원의 유명한 만루대이다.
운주사에 모인 송태하와 옛 부하들은 원손 선견에게 예를 취한 뒤 거사를 함께 도모할 문인들을 만나러 이동했다. 그들이 당도한 곳은 안동의 병산서원인데 이것은 어떤 이유에서건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다. 인조 말엽인 추노의 배경이 되는 시기의 안동은 남인의 거점이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시대 붕당정치의 복잡한 계보를 알아야 하지만 단순화하자면 병산서원은 남인의 영수인 유성룡이 세운 곳이다.

인조시대는 잘 알다시피 서인정권이 집권하면서 남인을 중용하는 형태였는데, 당시 소외된 붕당은 북인이기 때문에 인조를 꺾고자 하는 송태하 일행이 남인의 영수인 병산서원에 모여 반란을 도모한다는 것은 전혀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이다.

인조반정을 계기로 밀려난 북인(北人)은 이후 흥선대원군 이전까지 중앙정치에 등장하지 못했던 것을 감안하면 송태하 일행의 반란 기도는 분명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북이 조선시대에 걸쳐 전반적으로 중앙정치에서 소외된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인조 때 병산서원과 소현세자 추종세력과의 연결은 사실과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운주사는 명확히 지명을 밝히면서 송태하 일행이 도착한 지명을 언급하지 않은 것을 보아 병산서원을 특정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반면 과연 송태하 이하 8명의 무인들로 반란은 가능할 것인가?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다. 병자호란의 빌미가 되었던 이괄의 난은 고작 1만2천 명의 군사를 일으켜 파죽지세로 한양성을 함락하고 인조를 공주까지 몽진시킨 것을 보면 당시 조선의 군사력이 얼마나 취약한지 알 수 있다.

또한 황철웅이 송태하에게 상대가 되지 않듯이 일정수의 군사만 모을 수 있다면 송태하의 반란은 적은 수로도 얼마든지 난을 성공시킬 가능성이 있다. 다만 송태하가 원손의 사면을 먼저 거론한 반면 문인들은 바로 세자 운운하며 반정에 목표를 내세워 이들의 목적이 같으면서도 다르다는 것을 노출했다. 이 미세한 차이는 앞으로 어떤 변화의 계기로 작용될 가능성이 높다.

한편 일각에서는 추노 스토리가 다소 느슨해져서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평이 흘러나오고 있는데, 이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것이다. 추노 곽정환 감독이 피디저널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밝힌 바에 의하면 그는 한성별곡-정에 이어 이번 추노에서도 변치 않는 일관된 작품관을 가지고 있음을 재삼 확인시켜 주었다. 내용을 추려보면 '사회구조, 계급적 모순 그리고 정치현실 등이 어떻게 스스로를 좌절시키냐는 이야기'에 대한 접근이다.

다만 그것을 대놓고 말한 한성별곡이 무겁고 재미없다는 평에 억눌려 시청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했던 뼈아픈 기억을 가진 곽PD는 이번 추노에서는 재미와 의미의 저울질을 잘 해내고 있다. 가끔 선정성 논란을 야기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방극장 관객들은 추노가 가진 재미를 외면하지 못했다. 이번 주 12회를 마치면서 딱 절반을 달려온 추노는 이제 진짜 이야기가 전개될 것이다.

13회 예고는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까지 펼쳐놓았던 이야기의 씨앗들이 본격적인 발아를 거쳐 꽃을 피우기 위한 처절한 사투를 그릴 것이다. 10년 간 언년이를 찾기 위해 아귀 같은 추노질을 해온 대길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한 채 두 번째 실연에 고통 받고, 서얼의 한계와 2인자의 콤플렉스를 못 견뎌하는 황철웅은 송태하를 찾아내기 위해 끝없는 살인을 저지른다. 반면 동생 만득이의 원수를 갚기 위해 천지호는 거꾸로 황철웅의 내방에 침입한다.

또한 거사를 도모하기 위해 규합된 송태하 진영도 혜원을 두고 갈등이 생긴다. 혁명에 낭만 따윈 필요 없다는 사림의 엄숙주의로 혜원을 태하에게서 떼어놓기 위한 간섭을 하게 되고 이는 또 어떤 이별을 낳을 것인지 모른다.

태하의 청혼을 받고 행복의 눈물을 흘린 혜원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현재 드라마 바깥에서도 유일하게 불행하지만 드라마 속에서도 행복과는 담 쌓은 운명이다. 추노의 주요인물들이 지금까지 지탱해왔던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깨고 방황과 전환을 갖게 될 본격적인 해체의 단계에 접어드는 것이다.

예고도 없고 알려진 결말도 없지만 추노를 즐기는 모든 시청자들은 이 드라마의 끝을 결코 해피 엔딩으로 기대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미칠 것 같은 재미를 느꼈지만 사실 행복한 장면이라고는 없었다. 볼거리, 웃음거리 다 지우고 알맹이만 말하자면 쫓고 쫒기고, 죽고 죽이는 살벌하고 피 말리는 추격전이 전부다.

추노가 성공한 것은 절망과 아픔을 재미로 치장한 기술에 있다. 어쩌면 눈속임이라고 해도 좋을 여러 가지 수단들이 동원됐다. 거기에 대길패의 몸, 이다해의 몸, 주모의 몸 등 추노의 몸몸몸 시리즈는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끌기에 충분한 소재로 활용되었다.

계절이 겨울로 바뀌어도 왕손이 에피소드를 통해 기꺼이 최장군의 웃통을 벗어젖히게 하고 있다. 앞으로도 추노의 몸에 대한 집요한 추격은 멈추지 않을 것이기에 해체를 겪을 등장인물들의 또 다른 불행도 무겁고 딱딱하게 그려지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물들의 해체를 통해 시대상을 그려낼 앞으로의 이야기가 정작 추노다운 스토리이다.

아름다운 절망이란 말은 관념의 사치로 볼 수 있지만 우리가 지금 추노에 열광하는 것은 결국 그것에 부응하는 것이다. 추노가 희망을 향한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추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결말까지 줄곧 절망을 이야기 한다. 그것을 카타르시스라고 간단히 말할 수 없도록 역사라는 무게를 얹고 있다. 그 역사는 또 다른 현재이기 때문이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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