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 간의 정상회담이 무사히 끝났다. 정상회담의 성과에 대해 각양각색의 평가가 나오지만 대체로 북핵문제에 대한 주도적 역할을 인정받았다는 것과 한미FTA 재협상에 대한 불의의 일격(?)을 받았다는 점에 주목하는 분위기다.

보수언론은 ‘불협화음’에 방점을 찍고 있다. 특히 조선일보는 미국이 무조건적인 대북 대화 재개를 지지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국내의 반미시위를 함께 다뤘다. 한미정상회담의 성과를 부정적으로 조망하고자 하는 명백한 의도가 있는 기사 배치다. 조선일보의 이러한 행보는 문재인 정부가 그 지지층에 대북 대화를 재개하지 말 것을 촉구하기 위한 걸로 보인다.

보수언론의 이런 행태는 충분히 예상가능 했던 것이다. 그런데 3일자 신문 지면에서 눈여겨 볼만한 또 하나의 대목은 한미정상회담에서 외교안보적 성과를 취하는 대신 ‘돈’과 관련한 문제는 내줬다는 식의 해석이 나온다는 것이다. 한미FTA와 방위비분담금 관련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것인데, 이런 시각을 가장 강하게 드러낸 것은 중앙일보다.

중앙일보는 3일 <외교안보 받고 돈은 내준 회담… 문제는 뒤처리다>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한·미 정상회담에서 우리는 남북 대화 등 외교안보를 챙긴 반면 한·미 FTA와 주한미군 분담금 등 경제 분야의 숙제는 잔뜩 떠안게 됐다. 결국 문제는 앞으로 복잡한 협상을 통한 회담의 뒤처리”라고 지적했다.

트럼프 미 대통령이 한미FTA 재협상 카드를 기습적으로 꺼냈기 때문에 이런 해석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우려가 되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이런 해석이 문재인 정부가 마치 외교안보적 성과를 위해 경제적 이익을 포기했다는 주장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해석에 동조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트럼프 미 대통령의 한미FTA관련 언급은 ‘기습’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청와대 역시 양국 정상이 한미FTA 재협상에 합의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했다. 물론 무역협정에 대한 재협상이라는 것은 따로 합의하지 않더라도 한쪽이 이의를 제기하면 언제든 관련 프로세스가 시작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트럼프 미 대통령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따져보는 게 먼저다.

동아일보는 트럼프 미 대통령의 발언을 ‘국내용’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동아일보는 3일 지면에 <국내 지지층 의식한 트럼프, 거친 ‘FTA 압박쇼’ 외교결례>란 제하의 기사에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이 속도를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선 과정에서 공약으로 내세웠던 한미 FTA 재협상 카드를 밀어붙여 ‘아메리카 퍼스트’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려는 포석”, “ 최근 ‘러시아 게이트’와 함께 ‘오바마케어’ 대체법안 처리에 난항을 겪으며 정치적 수세에 몰린 상황을 ‘외교적 성과’로 반전시키려는 의도”라는 등의 해석을 내놨다.

동아일보의 해석은 상당 부분 타당하다. 이 맥락을 한미정상회담 공동성명이 언론에 늦게 알려진 정황과 연결시켜보면 이해의 폭은 더 넓어진다.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미 대통령은 현지시간으로 낮 12시에 공동언론발표를 했으나 공동성명은 7시간 후에 발표됐다. 미국 순방에 동행한 더불어민주당 김경수 의원은 이를 두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발표를 기다려야 했던 7시간이 7년은 되는 것 같았다”고 표현했다. 7시간 지연의 원인은 라인스 프리버스 백악관 비서실장이 결재를 미뤘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백악관에서 한-미 단독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선 공동언론발표와 공동성명 내용의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미FTA 재협상을 시사한 것과 “인내는 끝났다”는 북핵 문제에 대한 강경 발언이 여기에 들어간다. 공동성명은 외교적 구속력이 있는 양국 간 합의문의 성격을 갖고 있지만 공동언론발표는 말 그대로 언론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브리핑이다.

만일 관례대로 공동언론발표 직후 공동성명이 공개됐다면 미국 언론들은 양자 간의 차이에 주목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동성명이 7시간 동안 발표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 언론들은 트럼프 미 대통령의 대북 강경 발언과 한미FTA 재협상 요구를 주요 골자로 한 기사를 내보내야 했다. 국내 언론을 통해서만 정보를 취하는 미국인들은 트럼프 미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대북 강경책을 주문하고 한미FTA 재협상을 실제로 요구한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이 두 가지 문제는 국내적 차원에서도 중요하다. 오바마 정권의 유산을 지우기 위한 행보로 연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내는 끝났다”는 표현은 처음 나온 게 아니다.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이 이미 지난 3월 한미외교장관회담에 앞선 공동기자회견에서 “지난 20년 동안 대북 정책은 실패했고, 분명히 말하지만 전략적 인내 정책은 끝났다”고 말한 바 있다.

‘전략적 인내’는 오바마 정권의 대북 정책 기조다. 북한에서 혼수상태로 송환됐다 숨진 대학생 오토 웜비어 사건은 오마바 정권의 정책에 대한 반대 여론을 확산시키고 있다. 오토 웜비어의 아버지인 프레드 웜비어는 지난 15일 기자회견에서 아들을 데려오기 위해 이전 정부의 충고에 따랐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다며 “올해 초 ‘전략적 인내’를 끝내기로 마음먹었다”고 발언했다. 오바마 정권의 정책 때문에 아들 문제가 악화됐다는 분명한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한미FTA 재협상이나 중국의 철강 덤핑 판매 관련 문제 역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오바마 정권과의 차별화를 위해 지난 대선에서 공세적으로 언급한 바 있는 소재다. 한미FTA 등 무역불균형 문제로 미국의 철강과 자동차 산업이 타격을 받게 됐다는 거다. 이러한 주장은 제조업에 종사하는 백인 노동자들이 밀집해있는 이른 바 ‘러스트 벨트’에서 효과를 발휘했다. 트럼프 미 대통령의 눈으로 보면 이들이야말로 위기 상황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SOS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지지층일 것이다.

물론 트럼프 미 대통령이 ‘국내용’의 맥락에서 이런 발언들을 했다고 하더라도 현실적 영향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실제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에 대한 중국의 압박이 충분치 않다는 인식을 드러내며 인신매매국가 규정, 단둥은행 제재, 대만에 대한 무기판매 계획 승인, 남중국해에서의 ‘항행의 자유’ 작전 강행으로 이어지는 대중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오는 6일 G20 정상회의를 기점으로 상황이 변화할 가능성도 있지만 쉽게 낙관하기 어렵다. 미국이 중국을 코너로 몰아넣으면 중국 입장에선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가 상승해 압박 수위를 높이기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

미중관계를 제외하더라도 여전히 남북관계 개선으로 가는 길이 순탄치 않다는 것 역시 문제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는 이날 한겨레 칼럼에 “한반도 질서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남-북-미 삼각관계가 선순환해야 한다. 한-미, 남북, 북-미라는 세 개의 양자관계에서 하나라도 막히면 다른 관계는 앞으로 나가기 어렵다”고 썼다. 다시 말하자면 북한이 한미정상회담의 성과와 의미를 제대로 직시하지 않으면 관계개선이 어려울 수 있다는 얘기다.

북한은 노동신문을 통해 “남조선 당국이 친미사대의 구태에 빠지고 대미 굴종의 사슬에 얽매여 있는 저들의 가련한 몰골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며 “남조선 당국이 진실로 남북관계 개선에 관심이 있다면 시대착오적인 대미 추종정책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개선의 신호는 아직 보이지 않는 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은 문재인 정부가 강경책으로만 일관하라는 보수세력의 공세와 온건책에 대한 북한의 외면이라는 이중의 압박에 직면할 수 있다는 우려를 갖게 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언론이 자기 책임을 다해야 할 시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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