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자면 ‘협치’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박근혜 정권 때부터 각광받기 시작한 이 단어에는 정치에 어떤 ‘선의’를 기대하는 묘한 시선이 있다. 각 정치 세력이 각자의 선의로 신의성실하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물론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 정치에 그런 일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전문가들이 말하는 대로 개헌을 한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대 사회의 정치란 결국 “주고받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정치가 이런 자기규정을 스스로 바꿀 마음을 먹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협치’란 개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선의’가 아니라 ‘명분’이다. 정치는 주고받는 것이기도 하지만 명분을 놓고 겨루는 것이기도 하다. ‘협치’에는 분명 명분이 있다. 물론 명분을 기만적으로 활용하는 세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표적으론 자유한국당이다. 그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를 돌이켜보면 이제와서 ‘협치’를 외치는 그들의 모습에서 불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자유한국당의 기만적 태도만 탓할 수도 없다. 청와대가 국회의 인사청문보고서 채택이 불발됐음에도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임명을 밀어 붙인 이후 상황은 우려를 말할 수밖에 없는 국면으로 흘러가고 있다. 야당들은 청와대가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에 이어 강경화 외교부 장관 임명도 강행할 경우 ‘협치’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연일 계속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정우택 당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와 의원들이 1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임명강행을 규탄하고 있다. (연합뉴스)

앞에서 ‘선의’에 대해 말했지만, 강경화 후보자를 지명철회 한다고 해서 잔뜩 독이 오른 야당들의 분위기가 고분고분해질 리는 없다. 그러나 ‘명분’을 중심에 놓고 보자면 문제의 성격은 달라진다. 청와대는 아니라고 하지만, 현재 국면에서 인사 문제는 결국 추경과 정부조직법 개정 문제와 연관될 수밖에 없다.

야3당의 공조 흐름이 유지되고 있는 걸 보라. 애초 더불어민주당은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국민의당, 바른정당과 추경 예산안 심사를 진행하기로 했다고 발표했으나 다음날인 14일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은 이를 뒤집고 자유한국당을 포함한 야3당 공조에 합의했다. 대신 추경 예산안 심사 자체를 거부하던 자유한국당은 이 합의 덕에 최소한 심사는 진행하는 것으로 입장을 바꿨다.

비슷한 일이 14일 장관급 공직 후보자들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도 벌어졌다. 자유한국당은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임명 강행을 빌미로 인사청문회를 보이콧한다는 입장이었으나 오후 들어 청문회 일정에 다시 복귀했다. 바른정당과 국민의당은 14일 오전만 해도 강경화 후보자에 대한 다소 유연한 입장을 내비치는 듯 했으나 오후 들어 청와대의 ‘검증 부실’을 문제 삼으며 다시 공세로 전환했다.

‘검증 부실’ 논란은 안경환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책 문제로부터 불거졌다. 안경환 후보자가 지난해 출판한 <남자란 무엇인가>에 성차별적 인식을 드러내는 대목이 다수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안경환 후보자는 남성들의 전형적 모습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라는 요지의 설명을 내놓고 시대의 요구를 인정하고 남성들이 변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고자 한 글의 취지를 살펴달라는 해명을 내놨다.

문제는 이에 대한 야3당의 반발이 청와대의 ‘인사검증’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의당은 “이쯤 되면 조국 수석 청문회를 해야 할 상황”이라고 까지 주장했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과거 페이스북을 통해 이철성 경찰청장의 음주운전 은폐 시도 전력을 비난했다는 이유로도 보수언론 등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 마찬가지로 음주운전 전력이 있는 조대엽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를 걸러내지 못한 것은 ‘내로남불’에 불과하다는 식이다.

이쯤 되니 여의도에선 “청와대의 사석(捨石)작전이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정권과 각을 세워야 생존의 근거를 마련할 수 있는 야당들에게 조대엽 후보자 등을 먹잇감으로 던져놓고 강경화 후보자를 살리겠다는 것 아니냐는 얘기다. 호사가들이 지어낼만한 얘기지만 청와대가 음주운전 경력에도 조대엽 후보자를 내정한 걸 이해하기 위해선 이런 시나리오에라도 속아봐야 할 판국이다.

안경환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1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적선동 청문회 준비사무실로 출근하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이게 청와대의 ‘기술’이라는 설명을 믿어본다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앞에서 정치는 주고받는 것이라고 했는데, 상대가 이미 가치를 간파한 카드로는 원하는 협상의 결과를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야3당이 공조할 또 하나의 명분을 마련해주는 것밖에 안 된다.

굳이 기술을 쓰고자 한다면 분할통치(divide and rule)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자유한국당을 나머지 두 야당과 분리하는 것이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자유한국당이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명분상의 공감대다. 자유한국당이 추경 심사 거부와 인사청문회 보이콧 카드를 포기하고 야3당 공조를 모색한 것은 이 명분을 주지 않으려는 움직임이다.

청와대가 자유한국당은 거부할 수밖에 없고 나머지 두 야당은 받아들일 수 있는 정치적 카드를 내민다면 야3당 공조는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임명 강행은 이의 초석이 될 만한 선택이었다. 자유한국당은 펄펄 뛰지만 합리적 보수를 자처하는 바른정당의 주요 인사들까지도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의 개혁성은 인정한다. 국민의당은 “국회 청문보고서 채택 없는 공직후보자 임명 강행은 이번이 마지막이 돼야 한다”고 했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까지는 받아들이겠다는 얘기다.

그러나 청와대는 강경화 후보자 임명 철회를 선택할 의사가 전혀 없다. 이는 국민여론이 나쁘지 않다는 점을 고려한 청와대의 정치적 선택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리스크는 최소화해야 한다. 야3당이 이런 식으로 모여 있는 그림이 유지되면 여소야대 국면에서 청와대가 국회 내 주도권을 발휘하기가 어렵다. 이 국면에서 청와대의 목표는 어떤 방식이든 국회 내에서 다수를 형성하는 것이고 ‘협치’는 이를 위한 명분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야3당이 강경화 후보자 임명시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인준안을 부결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대행 체제로 갈 수 있다”고 했다지만 그걸로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 ‘검증 부실’ 논란으로 조국 민정수석과 안경환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흔들리면 검찰 개혁도 흔들린다. ‘사석작전’으로는 모자란다. 명분을 중심에 놓고 출구전략을 모색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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