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전혁수 기자] 지난 겨울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정권교체를 이뤄낸 주역은 국민이었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국민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함께 '적폐청산'을 외치며 "나라다운 나라에 살고 싶다"는 열망을 드러냈다. 여기서 언론은 도려내야할 적폐 중 하나로 지목받았다.

▲지난 1월 광화문에서 열린 촛불집회 모습. (연합뉴스)

언론의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특히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큰 KBS, MBC 등 공영방송을 먼저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지난 박근혜 탄핵 국면에서 '국민의 방송' KBS는 '정권의 방송'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만나면 좋은 친구' MBC는 촛불시민을 만나자마자 쫓겨났다. 자부심을 느껴야 할 회사 마크를 떼고 취재를 하는 기자들도 있었다. 국민들의 공영방송에 대한 신뢰도가 얼마나 추락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KBS와 MBC는 빈번한 비정상적인 보도 행태와 함께 민주당 도청 사건, 이정현 보도지침 사건, 백종문 녹취록 사건 등이 잇따라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 지난해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은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이정현 전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대표가 전화를 걸어 KBS 세월호 리포트를 삭제할 것을 요구한 사실을 폭로했다.

지난 2011년 KBS가 민주당의 최고위원회의를 도청했다는 의혹도 다시 제기되고 있다. 뉴스타파 보도에서 임창건 전 KBS 보도국장은 "녹음기나 핸드폰으로 민주당 최고위원회의를 몰래 녹음한 행위가 있었다"고 말했다. 임 전 국장은 도청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된 발언록 형식의 문건이 당시 한선교 의원에게 건네진 것도 사실이라고 증언했다. 임 전 국장이 "뉴스타파 보도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말을 바꿨지만, 재수사가 불가피해 보인다.

MBC는 더 심각하다. 특정 정파에 완전히 장악되다시피 해 지적할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지난 촛불집회 국면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반대집회를 주도한 '박사모'가 가장 신뢰하는 매체가 바로 MBC다. 당시 탄핵 반대 집회 현장에서 한 박사모 회원은 기자에게 "뉴스는 MBC만 봐야 한다"고 당부했다. MBC가 얼마나 '친박근혜 방송'이었는지 알 수 있다.

▲KBS 이사회 이인호 이사장(왼쪽)과 방송문화진흥회 고영주 이사장. (연합뉴스)

어쩌다가 공영방송이 이 지경까지 추락한 것일까. 근본적인 원인은 공영방송의 지배구조에 있다. KBS 사장을 선출하는 이사회는 여당이 추천하는 이사 7명과 야당이 추천한 4명의 이사로 구성돼있다. 그리고 7:4의 불균형한 구조에서 선출된 사장은 당연히 여당 편향적 성향을 지닐 수밖에 없다.

MBC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MBC 사장을 선출하는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진은 대통령 추천 3명, 여당 추천 3명, 야당 추천 3명의 이사로 이뤄져 있다. 사실상 정부여당과 야당이 6:3의 구조를 갖춘다. 편향적인 방문진 이사회에서 뽑힌 MBC 사장은 KBS와 마찬가지로 특정 정권에 편향된 인사일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참고로 KBS 이사회 이인호 이사장은 뉴라이트 학자로 잘 알려져 있고, 고영주 방문진 이사장은 "문재인은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하고 있는 인물이다. KBS 이사회와 방문진을 취재하는 한 기자는 "(공영방송 이사들은) 막말은 기본이고 정치적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면서 "국회보다 더 정파적인 곳이 바로 공영방송 이사회"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이사회의 선택을 받은 공영방송 사장들이 바로 국민들이 '언론 부역자'라고 부르고 있는 KBS 김인규 전 사장, 길환영 전 사장, 고대영 사장, MBC 김재철 전 사장, 안광환 전 사장, 김장겸 사장 등이다. 이들은 정권의 입맛에 맞는 뉴스를 생산해 오직 국민만을 바라봐야 할 공영방송을 어용방송으로 변질시켰다. 망가져가는 공영방송을 지키려던 기자, PD 등 언론종사자들이 해직되고, 한직으로 내몰렸다.

▲지난해 12월 전국언론노동조합으로부터 지목된 언론부역자 10인. ⓒ미디어스

이명박-박근혜 정권 9년 간 왜곡된 공영방송으로 이득을 취한 것은 바로 한나라당-새누리당에서 당명을 바꿔 존속하고 있는 자유한국당이다. 자유한국당은 공영방송이라는 강력한 우군을 배후에 두고 여론 조작을 일삼았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에 불리한 보도, 시사프로그램 등이 불방되기도 했고, 기계적 중립이라는 미명 아래 국민들의 정치 불신을 가중시켰고, 각종 선거에서 정부여당의 선거 승리를 위한 도구로 공영방송을 이용하기도 했다.

언론시민사회와 당시 야당(현 더불어민주당)은 공영방송 이사회 여야 추천 이사 비율을 7:6으로 바꾸고, 사장 추천 시 2/3 이상의 찬성을 받도록 하는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골자로 하는 '언론장악방지법'을 내놨다. 국민의당, 정의당 등 다른 야당도 언론장악방지법에 힘을 보탰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방송을 장악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자 자유한국당은 이러한 시도를 '야당의 언론 장악 음모', '언론노조의 방송 장악'라며 황당무계한 비난을 늘어놨다.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언론장악방지법 공청회에 참석한 언론학자들이 "완벽한 법은 아니지만 지배구조 개선 부분은 시도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정리했음에도 자유한국당의 몽니는 멈추지 않았다. 지난해 6월 국회의원 162명의 서명을 받아 발의된 언론장악방지법은 아직도 국회 통과는커녕 상임위 문턱도 넘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이후 문 대통령을 중심으로 방송 정상화 작업이 시작됐다. 문 대통령은 황교안 전 총리의 알박기 인사로 방송통신위원회에서 근무 중이었던 김용수 차관을 미래부 제2차관으로 보내 방통위 대통령 인사권을 확보했다. 민주당은 언론부역자로 지목된 고대영 사장, 김장겸 사장, 고영주 방문진 이사장의 자진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9년의 방송 적폐청산에 대한 강력한 의지의 표명으로 풀이된다.

이 같은 조치에 야당으로 입장이 바뀐 자유한국당은 "문재인 대통령의 방송 장악 음모가 시작됐다"며 비난을 가하고 있다. 자신들이 과거 자행했던 일로 정권의 방송으로 전락한 공영방송을 바로잡는 일에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자유한국당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위원들이 기자회견 하는 모습.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의 김용수 차관 인사가 발표된 지난 6일 자유한국당은 "문재인 정부의 언론장악 꼼수"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기자의 경험상 선거 기간과 국정감사 기간을 제외하고는 정당에서 늦은 저녁 시간에 논평이 나오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자유한국당은 6일 공휴일 오후 8시가 넘어 긴급하게 논평을 냈다.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다.

자유한국당은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의 방송 관련 인사, 발언 등에 대해 이례적으로 수 차례 논평을 내놓고 있다. 6일 긴급 논평에 이어 7일 "미래부 차관 임명 철회하고 방송장악 기도를 중단하라"고 주장했고, 9일에는 민주당의 공영방송 사장 사퇴 요구에 대해 "정부와 여당은 '언론개혁'을 말하면서 '방송장악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을 당장 중단하라"고 날을 세웠다.

자유한국당이 이처럼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의 방송 관련 행보에 호들갑을 떠는 것은 그 동안 자신들이 방송을 장악해왔다는 '고백'으로 풀이된다. 문재인 정부가 자신들이 했던 방식대로 방송을 장악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9대선 과정에서 언론정상화를 약속했지, 방송을 장악하겠다고 한 적이 없다. 지난 4월 13일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한국기자협회-SBS 주최 토론회에서 "정권의 공영방송 장악에 항의하다가 쫓겨나거나 징계 받은 언론인들 전원 복직시키고 명예회복 시키겠다. 지난 대선 때도 공약했었는데 이번에 당선되면 약속을 지킬 것"이라면서 "정권이 공영방송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언론장악금지법을 제정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자유한국당은 문재인 정부의 언론정상화 조치를 방송장악 음모라고 폄하하며 억지만 부릴 것이 아니라, 문 대통령의 의지에 동참해 힘을 실어줘야 한다. 그것이 과거 자유한국당이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자행한 방송장악을 속죄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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