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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사라진 한일전, 불온한 무한도전[탁발의 티비 읽기] 무한도전의 마법같은 시청자 다루기
탁발 | 승인 2010.02.01 11:55

   
 
무한도전이 직접 무엇인가 하지 않고 조력자로 등장하는 것은 상당히 의외의 도전이었다. 권투라고 해서 무도 멤버들이 못할 것이 없지만 주체가 여성인지라 9년 경력의 길 또한 한발짝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2주에 걸쳐 방영된 무한도전 권투편은 아마도 역대 가장 슬픈 한일전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싶다. 경기 중에는 딱히 누굴 응원할 지 결정하기 어려웠고, 막상 최현미 선수가 승리했어도 즐거움을 애써 감춰야 했다.

무한도전이 자막으로 밝혔듯이 아름답고 치열한 두 소녀의 열전은 승자를 굳이 가릴 필요 없는 경기였다. 스포츠라는 것이 반드시 승자와 패자를 가려야 하는 불변의 법칙이 참 비정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럴 수만 있다면 둘 모두에게 챔피온 벨트를 안겨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은 모두의 바람이었을 것이다. 대전료도 없이 치른 경기에 누군가 패자의 아픔만 가져가게 한다는 것이 이 날만은 너무 잔인하게 다가섰다.

한일전은 양 국민 모두에게 참 특별하다지만 아무래도 한국 쪽이 좀 더 강한 승부욕을 보이게 된다. 이기면 부모 원수라도 갚은 듯 기뻐했다. 질 때면 또 다시 국치라도 맞은 양 우울하고 슬펐다. 그러나 그 슬픔에 은근슬쩍 개개인의 우울까지 얹을 수 있어 한일전은 사실 이기건 지건 관전자에게는 기대 이상의 정화작용을 가능케 해준다. 그러나 이번 무한도전 최현미 대 츠바사의 시합은 그런 전형적 한일전의 일반 현상들을 차단했다.

   
 

결론적으로 최현미 선수가 무사히 2차 방어전을 치를 수 있어 다행이지만 그보다도 혐오스런 일본인이 아니라 기특하고 안쓰럽기까지 한 츠바사를 통해서 무한도전은 일본의 한류에 대해 모처럼 그러나 당연한 답례를 보냈다는 의미를 갖는다. 일본의 한류의 가장 큰 무대이자 가장 적극적이면서 의외인 나라이다. 그들조차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비인기 종목의 선수에게 무한도전이 보낸 따뜻한 시선은 아마도 일본의 한류 팬들에게 뿌듯한 보람을 가져다 줄 것이다.

최현미 선수가 이겨서 좀 더 여유를 갖고 츠바사 선수를 돌볼 마음이 가능했겠지만 설혹 그 반대의 결과라 하더라도 두 선수를 향한 마음이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본질적으로 올림픽 정신으로 대표되는 스포츠는 인종과 국적을 벗어난 순수한 경쟁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내셔널리즘이 강조되는 것이 현실이다. 한일전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양국의 치열한 애국경쟁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한일 간의 스포츠 경기에서 국적이 사라진 최현미와 츠바사의 경기는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일제강점의 역사가 사라질 수 없듯이 양국이 존재하는 한 피할 수 없는 숙명의 대결의식이 사라져 버렸다. 무한도전의 신비한 마법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한일우정의 해 등을 통해 대대적인 물량을 투입해서 캠패인을 벌여도 좀처럼 해결될 수 없는 것이 한일감정이 단 2주의 방송을 통해서 (비록 일시적이고 한정적이지만) 사라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무한도전의 두 소녀는 애국심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했다. 신기한 일이다.

   
  ▲ 무한도전의 자막의 특별함을 잘 보여준 "최선 다한 상대에게 부끄럽지 않은 경기" 참 대단한 언어의 연금술이다.  
 

그런 경기에서 링 위의 두 소녀에게 지옥 같을 10라운드를 마친 후 승자의 손을 들어 올리지 않은 무한도전은 아주 영리했다. 하기사 바보가 아니라면 최현미 선수의 승리를 강조해서 스스로의 마법을 깨지는 않을 것이다. 실시간 중계와 달리 녹화 편집의 위엄이다. 실황중계라면 어쩔 수 없이 보통의 경기 결과를 노출해야 했을 것이다. 두 달 전 경기를 가지고 이런 스펙타클을 끌어내는 것을 보면 참 놀랍기만 하다.

사실 스포츠는 정치이다. 히틀러가 베를린 올림픽을 노골적으로 정치에 이용했지만 훨씬 전부터 지금까지 스포츠는 정치와 뗄 수 없는 관계로 발전해왔다. 최근 남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영화 인빅터스는 감동으로 포장했기는 하지만 스포츠와 정치의 관계를 잘 그려내고 있다. 정치만큼이나 권력적인 스포츠에 일개 예능 프로인 무한도전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멋지게 승리를 얻어냈다. 적어도 상징적으로는 그렇다. 그래서 가끔 무한도전은 PD수첩이나 100분토론보다 더 불온(?)하다. 장하다.

대한민국 평균 이하의 콘셉트로 5년을 지탱해온 무한도전은 적어도 이 날만은 평균 이상이었다. 비록 주인공에서 스태프로 물러섰지만 주인공 이상으로 존재감을 전달했다. 1년짜리 벼농사 프로젝트도 있었지만 그것과 다른 스포츠 경기를 두 달이나 묵힌 무한도전에서 적지 않은 고민과 치밀한 준비를 읽을 수 있다. 무한도전 최현미 편은 비인기종목 돕기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더 크고 본질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무한도전의 신화는 아무래도 좀 더 오래 기록될 것 같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탁발  treeinu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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