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C의 악몽이 시작된 건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부터다. 평단의 혹평을 극복하려고 만든 후속작 ‘수어사이트 스쿼드’는 또 어떤가.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의 오명을 걷어내기는커녕 ‘DC는 마블을 정녕 넘을 수 없는가’라는 패배의식을 다시금 확인하게 만든 졸작으로 명성을 날리고야 만다. 아니, ‘형만 한 아우 없다’는 표현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만들지 않았는가.

이런 뼈아픈 2연패를 의식이라도 한 듯 이번에는 ‘원더 우먼’의 메가폰을 잡은 감독이 액션보다는 심리적인 묘사에 치중하는 연출을 구가했다. 그 덕분일까. 미국 영화비평의 대표적인 리트머스인 로튼토마토에서는 이 영화의 신선도를 9할이 넘게 평가하고 있고, 한국 극장가에서도 누가 누가 시리즈를 못 만드나 내기 중인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의 스코어를 넘을 듯하다.

영화 <원더 우먼> 스틸 이미지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하지만 미국 평단 분위기가 칭찬 일색이라고 해서 이에 편승하고 싶지는 않다. 되레 로튼토마토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이 영화의 단점을 짚어보고자 한다. 먼저 이 영화의 단점을 언급하려 했던 건 ‘사랑 지상주의’였다. 주인공 다이애나의 고향인 여성만 있던 섬 데미스키라에서는 눈 씻고 보려야 볼 수 없던 첫 번째 ‘남성’ 영국군 트레버와 잠자리까지 갖는 원더 우먼을, 사랑 지상주의로 귀결하고야마는 여성 히어로의 한계로 애초 분석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런 비판적인 생각을 철회하게 만든 건 ‘슈퍼맨의 순애보’를 상기하고 나서다. 1970년대에 만들어진 이 영화 속 외계 남성도 사랑하던 지구인 여성이 숨을 거두자 그녀를 살리기 위해 시간을 되돌리고자 갖은 애를 쓰는 모습을 상기해 본다면 슈퍼맨 역시 히어로가 사랑 지상주의에 천착한다는 비판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 아닌가. 남성 외계인은 사랑을 허용해도 되지만 데미스키라 출신 아마조네스 여인에게는 사랑 이전에 히로인으로 남았어야 했다는 이중 잣대를 들이대고 싶지는 않아졌다.

자, 그럼 이 영화의 단점을 짚어보기에 앞서 다이애나가 데미스키라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1차 세계대전에 발을 딛는 이유를 되새겨보아야 한다. 다이애나는 인간의 대의명분과는 상관없는 제 3자다. 다이애나가 인간의 전쟁에 휘말리는 이유는 심리학적으로 보면 크게 두 가지 면에 기인한다.

영화 <원더 우먼> 스틸 이미지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하나는 ‘각인(Imprinting)’이다. 여자들만 있던 세상에서 처음 본 남자가 영국군 대위니 심리적으로 영국군 편에 서게 될 확률이 높다. 처음 본 이성에게 호감을 느끼고, 처음 본 이성이 속한 군대의 편에 서서 아레스를 저지하고 싶은 게 다이애나의 심리다. 만일 다이애나가 처음 본 남자가 독일군이었다면 각인 심리로 인해 다이애나는 영화 속 설정과는 반대로 아레스를 영국군, 혹은 프랑스군으로 착각하고 확증했을 위험성이 도사린다.

두 번째 요인은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다. 다이애나가 적으로 간주하는 아레스가 루덴도르프라고 확신하는 다이애나의 심리를 심리학적으로 본다면 확증 편향으로 분석할 수 있다. 루덴도르프를 제거하기 위해 인간의 전쟁에 뛰어드는 다이애나의 확증 편향적인 측면은, 자칫하면 관객으로 하여금 여성은 남성보다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 쉽다는 점을 관객들에게 은연중에 심어주기 쉽다.

아레스의 실체를 미리 알아채지 못하게끔 복선을 까는 것은 중요하지만, 자칫하면 여성이 남성보다 확증 편향으로 말미암아 잘못된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걸 관객에게 은연중에 심어줄 수도 있음을 영화는 미처 깨닫지 못한다.

영화 <원더 우먼> 스틸 이미지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연출 면에서 ‘에러’도 있다. 첫 번째는 액션의 ‘고루함’ 혹은 ‘상투성’이다. 액션 영화의 한 획을 그은 ‘매트릭스’의 ‘불릿 타임(Bullet time)’은 이 영화가 만들어진 1999년 이후인 21세기가 되어서도 액션 영화에서 두루 애용되는 신기원적인 액션 연출이다. 한데 ‘원더 우먼’은 불릿 타임조차 타 액션 영화와 차별화하는 데 실패한 나머지 액션 장면을 보다가 졸음을 유발할 정도로 형편없다.

두 번째는 다이애나가 루덴도르프와 맞닥뜨리는 시퀀스다. 루덴도르프와 만나는 장소는 영국군 진지가 아니라 엄연히 독일군 초소다. 독일군의 서치라이트가 수시로 비침에도 불구하고 원더 우먼은 서치라이트를 피할 노력은, 그녀가 투명인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안드로메다로 보낸 지 오래다.

연합군을 발견하면 기관총을 난사하던 참호 속 독일군의 기민함은, 루덴도르프의 진영 안에 있는 독일군은 망각이라도 한 듯 사이렌도 울리지 않고 독일군 진지 안에서 작전을 진행한다는 긴박감은 찾기조차 어렵다. 아무리 로튼토마토에서 극찬을 했다 해도 필자에게 있어서는 커피가 아니었으면 도무지 졸음을 참기 어려웠던 영화가 ‘원더 우먼’이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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