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의 첫 수석비서관 보좌관 회의는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겐 대단히 만족스러운 신호를 남겼다. 받아쓰기가 필요 없고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한, 그야말로 ‘회의’라는 말의 본래적 의미에 맞는 방식으로 수석비서관 보좌관 회의를 운용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철학을 가장 잘 드러낸 말은 “이 회의가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인 만큼 참모들에게는 이견을 말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반대 의견이 있었다는 것까지 함께 (언론에) 나가도 좋다”, “대통령이 나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품지 말고 이상한 느낌이 들면 황당한 얘기처럼 들릴 수 있어도 자유롭게 얘기해야 한다”고도 했다. 이 말은 언뜻 보기에 참모들을 단순히 독려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민주주의라는 개념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언급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어찌됐건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에서 가장 큰 권한과 책임을 가진 이는 대통령 본인이다. 참모들로서는 대통령의 의견과 철학을 거스르는 발언을 꺼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 의견’이 없으면 토론이 되지 않는다. 이 회의에서 토론이 되지 않으면 올바른 국정운영은 불가능하다. 보수정권의 지난 9년간 문제도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참모들에게 그것이 ‘황당한’ 수준의 것일지라도 이견을 말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그래서다.

문재인 대통령이 25일 청와대 여민관 소회의실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의민주제를 따르는 나라에 야당과 여당이 맞부딪치는 의회가 반드시 존재하는 이유도 이와 같다. 많은 국민들은 “싸우지 않는 국회를 보고 싶다”고 하고 정치인들은 이에 곧잘 “일하는 국회를 보여 주겠다”고 화답하지만 ‘싸우지 않고 일하는 국회’는 사실 불가능하다. 정치인에겐 싸우는 것이 일이고, 뒤집어 말하면 이는 곧 ‘정치’의 가장 중요한 요소다. 싸우지 않는 것은 정치를 하지 않는 것이고, 정치를 하지 않는 국회란 곧 일을 하지 않는 국회이다.

최근 불거지고 있는 권력과 언론, 독자 간의 갈등 구도도 마찬가지 원리로 이해할 수 있다. 권력은 힘이 세다. 언론의 임무는 이를 감시하고 비판하며 ‘공론’을 조성하는 것이다. ‘공론’이 조성되는 과정을 정치의 언어로 하자면 ‘숙의’일 것이다. 권력이 숙의를 통한 공론을 생산적인 방식으로 존중하는 것은 바람직한 통치의 기본이다.

문제는 오늘날 이런 이상적 모델을 말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졌다는 거다. 언론은 “잘한 것은 칭찬하고 못한 것은 비판한다”는 명분으로 온갖 기술을 동원해 사건을 요리하며 자기 이익을 챙긴다. 정치는 “국민과 국가를 위해 결단했다”고 말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조차 뒷돈을 주고받는 데 익숙하다. 권력은 언론을 장악하고 정치를 무력화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과거 같으면 은폐되고 조작됐을 스캔들은 오늘날처럼 미디어가 정보를 거의 완전히 지배하는 사회에선 의도치 않은 실수들을 통해 대중(이 아래부터 나오는 ‘대중’에는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포함된다) 앞에 낱낱이 밝혀진다. 대중은 더 이상 민주주의의 이상을 말하는 자들을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 대중은 정치와 언론의 ‘엘리트’들이 말하는 명분이 아니라 자신들과 보다 비슷한 처지에 있다고 인식되는 네티즌, SNS이용자, 팟캐스트 진행자의 주장을 더욱 신뢰한다. 특별한 영민함을 지녔지만 기성의 체제에 포섭되지 못한 정치인이나 언론인들은 이러한 새로운 흐름에 망설임 없이 편승한다.

어떤 사람들은 ‘작가’를 자처하는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내놓은 ‘진보어용지식인론’을 이런 사례의 하나로 지목하지만, 이게 권력의 ‘입각을 하라’는 요구에 대한 답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잠재적 정치인(?)이 택한 방어적 제스추어에 불과한 걸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그의 이런 ‘선의’를 인정하더라도 이는 결국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일들의 연속이 이른바 ‘진보언론’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태들의 보편적 배경이다.

어떤 사람들은 대중을 꾸짖거나 액면 그대로의 요구를 받아주는 것으로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소용이 없다. “역시 저들이 내세우는 ‘저널리즘’이란 허울뿐”이라는 확증편향적 인식의 근거를 제공할 뿐이다. 단기간에 대중의 믿음을 바꿀 수단은 없다. 그렇다면 남는 방법은 정치와 언론이 스스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장구한 노력을 거듭하는 것뿐이다. 얽힌 매듭을 단칼에 잘라내는 것과 같은 쉽고 확실한 해결책은 단언컨대 없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더 이상 사건 자체의 내용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이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오직 이 문제가 누구의 책임이며 배후에 어떤 사익의 논리가 작동하였는지일 따름이다. 그래서 오늘날 대부분의 ‘논쟁’이라는 것은 ‘왜 누구에게는 이러했는데 다른 이에게는 저러했는가’라는 ‘내로남불’의 논리를 따지는 것이거나 ‘너는 과거에 나를 속였으니 지금도 나를 속일 것’이라는 자격론, ‘네가 나를 기만하니 나도 너를 기만하겠다’는 무차별적 응징의 논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 과정에 애초의 ‘사건’은 사라진다.

그런데 사실 이는 대상을 구매할 것인지 말 것인지의 판단으로 상품의 생사여탈을 결정할 수 있는 ‘소비의 논리’이며, 이런 구조 속에서는 정치와 언론 역시 ‘상품’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상품은 스스로 대안을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상품이 되기를 자처한 정치와 언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 같이 망하는 일뿐이다. 그럼에도 왜 대중은 소비의 논리를 쉽게 채택하고 나머지 방식을 그토록 빨리 기각하는가? 그것은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이야말로 오늘날의 대중이 가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체제적 정체성이기 때문이 아닌가?

따라서 정치와 언론이 공론 조성과 숙의를 가능케 하는 공론장을 다시 복구해야 한다면 안락한 환경에서 벗어나 체제에 도전하는 어떤 결단을 내리는 것이 급선무이다. 정치는 대중이 오늘날 상실한 생산자이자 주권자이자 통치자로서의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시도를 거듭해야 하고, 언론은 사건의 본질을 간파하고 이를 탁월하게 다뤄내고야 마는 저널리즘의 본령을 구해야 한다.

즉, 대안을 만들고자 하는 정치와 언론은 우리가 지금 스스로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체제적인 것이라는 사실에서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우리가 목도하는 이 현상은 심지어 세계적이다. 저널리즘이 불능화 되고 정치가 마비된 세계를 확인해보고 싶다면 눈을 들어 시리아를 보라. 가짜뉴스가 언론을 대체하고 있어 인터넷을 통해 전파되는 어떤 정보도 전적으로 신뢰할 수가 없다. 내전 외에는 어떠한 정치적인 갈등 해결책도 찾을 수 없다. 세계는 오랫동안 이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언론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공공성과 공정성을 꼽아왔다. 뉴미디어의 시대는 여기에 다양성을 더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 상황이 앞의 디스토피아를 만든 또 하나의 요인이다. 공공성과 공정성을 다양성이 잠식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관철시키는 선순환을 만들려면 다시 매체 간의 생산적 비평을 말하는 게 필수다. 미디어비평지의 창간은 이를 저널리즘의 방식으로 모색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였을 것이다. 이러한 몸짓들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야 한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쉽게 살아왔다. 돌아보면 그저 ‘반MB’를 외치는 건 얼마나 손쉬운 일이었는가. 문재인 시대이기 때문에 대안을 꿈꾸는 정치와 언론은 과거 9년보다 더한 절박함을 가질 수밖에 없다. 동시에, 오히려 문재인 시대이기 때문에 정치와 언론은 숱한 실패를 반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나은 실패를 반복하는 것이야말로 대중의 요구에 답하는 거의 유일한 길이다. 이 가시밭길을 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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