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력이 있었던 것일까? 이렇게 기가 막히게 타이밍을 맞춘 드라마도 없겠다 싶다. 새 대통령이 뽑히고, 불감청(不敢請)이었던 시대에선 상상만의 고소원(固所願)들이 새 시대를 실감케 한다. 그리고 그런 '새' 시대에 발맞춰 드라마 <귓속말>에도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법률 카르텔의 아성 태백이 무너지고, 그 대표 최일환(김갑수 분)은 살인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그의 비호를 받던 법조계 인사들은 이제 교도소에 넘쳐난다. 돈봉투로 좌천당하는 우리의 법조계 인사들보다 한 술 더 뜬다.

그 놀라운 신세계, 하지만 <귓속말>을 열혈 시청한 사람이라면 안다. 그 신세계가 도래하기 까지 17부의 길고 긴 공방전이 펼쳐졌었음을. 이른바 '퉁수극'이라 할 만큼 매회 엎치락뒤치락 승기가 뒤집혔었음을. 심지어 다잡은 강정일(권율 분), 최수연(박세영 분)은 마지막 회까지 미꾸라지처럼 자신들이 가진 모든 법적 지식을 짜내 법망을 피하려 했음을. 하지만 결국 그들은 죄값을 받았다. 이동준이란 판사가 자기를 던져 새 시대를 맞이할 마중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마중물이 된 이동준, 그의 고행기

SBS 월화드라마 <귓속말>

<추적자 the chaser(2012)>, <황금의 제국(2013)>, <펀치(2014)>의 ‘복수 3부작’을 통해 우리 사회 이권 카르텔을 속속들이 파헤쳤던 박경수 작가. 복수의 대장정을 끝낸 그가 새롭게 들고 돌아온 <귓속말>은 ‘이게 박경수 작가 작품 맞아?’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치정극'처럼 포문을 열었다. 공정하단 평판이 자자한 젊은 판사 이동준(이상윤 분). 하지만 너무 곧으면 부러진다 했던가. 대법원장 사위의 재판에서조차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그는 대법원장을 비롯한 그간 그로 인해 불이익을 받았던 법조계 인사들로 인해 궁지에 몰린다. 그것마저도 자신의 강직함으로 돌파하려던 그. 하지만 어머니가 운영하는 요양원이 어려워지자 결국 태백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단 한 번 눈을 질끈 감으면 비록 판사는 아니지만 법조인으로서 계속 살아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던 그의 판단은, 그의 오판으로 인해 아버지를 감옥에 보낸 신영주의 도전을 받는다.

늘 착한 역만 맡던 이상윤의 캐릭터가 무색하게. 드라마가 시작하자마자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양심을 판 이동준. 하지만 그가 판 양심의 대가는 가혹했다. 세상이 부러워하는 태백의 사위가 되었지만 자신의 눈앞에서 연인 강정일과의 스킨십을 마다하지 않는 아내 최수연,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를 범법자로 만들고 로펌 태백의 사위까지 된 그의 비서가 되어 나타나 사사건건 그의 목을 죄여오는 신영주. 그의 하루하루는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최수연과, 난처한 입장의 그를 한번 더 다그쳐대는 신영주 사이에서 안전판 없는 줄타기와도 같은 시간의 연속이었다.

자신이 양심을 판 건 단 한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한 그이지만, 태백이라는 우리나라 최대의 로펌의 일원이 되었다는 건 그 한번이 영원으로 변하는 신호탄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한다. 바로 그 기로에서 고뇌하는 강직했던 판사는, 태백이라는 법률 카르텔의 일원으로 일신상의 안락과 영화를 누리는 대신 신영주와 '적과의 동침'을 택한다.

SBS 월화드라마 <귓속말>

하지만 그가 선택했다고 해서, 바로 개과천선의 삶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호시탐탐 그의 목숨까지 노리는 강정일과 최수연, 그런 두 사람의 배후에서 그를 너끈히 가지고 놀려는 최일환, 그리고 여전히 그를 미더워 하지 않는 신영주 사이에서 그는 널뛰기를 하며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박경수 작가의 작품이 늘 그래왔듯이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자신을 과오에 빠뜨린 우리 사회 기득권 체제에 도전하는 주인공의 행로는 고달프다 못해 롤러코스터가 따로 없다.

이기는 듯싶으면 그를 주저앉히고, 또 승기를 잡았는가 싶으면 궁지에 몰리고, 이동준으로 분한 이상윤의 눈망울은 그래서 17부작이 행로 동안 늘 뜻하지 않게 자신을 덮치는 위협과 위험에 휘둥그레지고 경악했다. 장군 멍군 치고 마지막 한 판 승으로 '카타르시스'를 담뿍 주며 명쾌한 승리의 세레모니를 안기는 여느 드라마들과 달리, 박경수 작가는 17부작 내내 심지어 한 회에서 몇 번씩 판세를 뒤집으며 주인공을 위기로 몰아간다. 자신의 영혼을 팔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주인공은 그래서 더 고통 받고, 그런 그의 고통과 몸부림은 결국 우리 사회 '적폐'의 일소가 그만큼 '간단'치 않음을 방증한다.

결국 스스로 태백의 주인이 되어 태백을 붕괴시키려 했지만 그조차도 여의치 않았던 이동준은 자신을 정의의 마중물로 바친다. 스스로 불법 자금의 유입 서류에 사인을 하고, 비자금을 든 가방을 들고 나선다. 그리고 바로 그 자신의 법복을 벗게 만들었던 그 '함정'을 자신의 죄로 고백한다. 그렇게 이동준 자신을 마중물로 내던지고 나서야 최일환이 잡혀간 다음에도 여전히 견고한 '이권 카르텔'이었던 태백이 균열되기 시작한다.

어린 학생들의 죽음, 일흔이 넘은 농부의 죽음이 앞서고서야 그리고 광장을 메운 촛불이 밝혀지고서야 구태의 정권이 무너지듯, 새 시대는 그렇게 느리고 완강한 저항을 넘어 힘들게 다가선다. 그러기에 이동준 판사의 지난한 고행기는 마치 많은 이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맞이한 이 시대를 고스란히 상징하는 듯 반갑고 갸륵하다.

엇갈린 사랑

또 하나 <귓속말>의 특징은 그간 박경수 작가의 작품들이 성공담 혹은 수사물 그리고 정치물의 여정을 보인 것과 달리, 태백이라는 로펌을 배경으로 한 연인의 사랑 이야기였다는 점에서 신선한 구도를 보인다.

SBS 월화드라마 <귓속말>

자신의 아버지를 감옥에 보낸 이동준을 파멸에 이르게 하고자 자신을 던진 신영주. 왜 하필 이동준이었을까? 판결은 이동준이 내렸지만 그 뒤에 태백이, 그리고 그의 하수인들이 즐비하게 포진하고 있었음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강직한 판사라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 자신이 정보를 제공했던 그 '배신'의 아픔이 신영주를 이동준의 비서라는 무리수를 두어가며 그를 옭죄었다. 집착이라고 할 정도로 이동준에 매달렸던 신영주, 그녀의 무리수는 결국 사랑으로 마무리된다.

이 커플의 사랑은 신선하고 매력적이다. 아직 두 사람이 견원지간처럼 으르렁거리며 그래도 한 배를 타려고 했던 시절 '수사 지시는 내가 한다'며 앞장서는 신영주의 모습으로 상징되듯, 그리고 마지막 재판 과정에서 ‘신영주 당신이 없었다면 난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라는 이동준의 소회처럼, 이동준보다 더 강건하게 자신의 신념을 향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의지적 인간 신영주와 그런 그녀를 믿고 의지한 이동준의 '동지적 사랑'이 <귓속말>의 주제를 담은 사랑이다.

하지만 그런 동지적 사랑만 있는 건 아니다. 이동준과 신영주가 원수에서 연인이 되어가던 그 시간, 아빠보다도 더 믿는 오빠에서 서로를 죽이지 못해 자신이 가진 모든 패를 내보이며 앙숙이 된 강정일과 최수연의 사랑도 있다.

미국 유학 시절부터 함께 지냈던 두 사람, 최수연에게 강정일은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동준을 제거해 버리며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둘의 사랑은 막상 위기가 닥치자 자신의 이해를 위해 최수연을 버린 강정일의 배신으로 인해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금'은 의심과 통수를 넘어, 결국 정략적으로 함께 살아야 하는 그 사실 그게 너무도 끔찍해서 자신이 가진 비밀의 포문을 열어 놓은 최수연과, 그런 최수연을 감옥에 보내기 위해 비자금 계좌로 딜을 하는 강정일의 치킨게임으로 마무리된다. 아버지의 유산을 거스르지 못한 채 자신의 기득권에 발목이 묶인 이들의 사랑은 자신들은 아니라 했지만 결국 '정략 연애'의 다른 버전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귓속말>은 그 이전 박경수 작가의 작품과 달리, 이 시대 두 연인을 전면에 내세운다. 원수에서 시작돼 신념을 공유하고 동지이자 연인이 된 이동준-신영주 커플과, 간쓸개도 다 빼어줄 것 같더니 결국 자신의 부도덕한 가계를 위해 사랑하는 이를 기꺼이 제물로 바치고 스스로도 파멸해 버리는 강정일-최수연 커플의 서로 다른 사랑 이야기. 그렇게 '사랑과 전쟁'의 태백 편을 <귓속말>은 17부의 여정동안 치열하게 다룬다.

그 이전 작품보다 젊은 세대를 전면에 내세워, 그들의 서로 다른 사랑 방정식을 통해 이 시대의 정의와 그 정의를 실현해 가는 방식에 천착했던 <귓속말>. 그 길고도 지루한 공방의 끝은 이동준이 변호사 자격마저 상실한 결과를 낳지만, 그의 표정은 드라마를 시작한 이래 가장 홀가분하고 밝았다. 그렇게 <귀속말>은 젊은이들에게 정의의 시대를 만드는, 정의의 시대를 지켜가는 방식 그리고 정의로운 사랑에 대해 묻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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