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맥스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아이맥스, 그거슨 진리!)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다. 1인 좌석을 구하는 데도 맨 앞자리 아니면 제일 뒷자리 뿐. 뒷자리는 왠지 소외되는 기분이고, 앞자리는 가끔 멀미를 하는 관객들이 있다는 매표창구 직원의 말에 포기. 암표를 구해볼까 잠시 생각했으나 8만원까지 치솟았다는 암표가격과 원고료를 비교해보니 결론은 쉽게 내려졌다. 결국 얻은 게 밤 10시 반 상영의 중간좌석. 혼자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영화, 라는 말을 우리가 어제까지 즐겨오던 관습적인 스타일의 문화콘텐츠만으로 국한해 본다면 그렇다. 영화에서의 3D 기술은 뤼미에르 형제 이후 점차 발전해 왔지만, 완만한 곡선을 그려오던 발전그래프를 제임스 카메론은 수직으로 꺾어버렸다. 아니, 사실은 영화라는 한 장르에만 국한되어 있던 것이 아니다. 이는 인류가 긴 역사를 통해 발전시켜 온 오래된 전통이다. 벽에 그려놓은 소나무 그림으로 애먼 참새들을 희생시켜야 했던 솔거나, 그리스의 제욱시스와 파라오시스의 그림 시합을 떠올리면 되겠다. 제욱시스는 포도넝쿨로 새들을 현혹시켰지만, 파라오시스는 그림을 덮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천을 그려 제욱시스를 속여 넘겼다. 현실을 대체하는 환영의 창조는 예술가들의 오랜 소망이었다. <아바타>는 현재 이 연장선상의 정점에 있다.

▲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신작 '아바타' ⓒ 폭스코리아

<아바타>는 최소한 영화가 형식적 차원에서 진화하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 중 하나다. ‘영화 2.0’까진 안 되도 ‘1.5’쯤은 된다. 숱한 전문가들이 각종 기술적 성취에 대해 전문용어들로 상찬을 하고 있으니 더 이상 말을 보태면 낭비다. 이는 이제 관객들의 열광이 증명하고 있다. 2D로 관람 후 3D재관람 비율이 7%, 숫자로 치면 무려 40만이나 된다고 한다. 이 정도로 열성적인 관객문화, ‘아바타 현상’이라 불릴만한 팬덤이 형성된 이상 천만 고지를 넘기지 못하는 게 오히려 어려울 거다. 한국에서 ‘얼리어답터 지향’은 이제 시대에 뒤처지지 않기 위한 생존 스타일이 됐다.

<아바타>의 줄거리는 간명하다. 때는 서기2154년, 무대는 지구에서 4.4광년 떨어진 행성 판도라다. 에너지 고갈로 위기를 맞은 지구의 다국적기업이 판도라에서 새로운 에너지원을 찾아내 이를 약탈하려는 과정에서 원주민인 나비족과 충돌한다. 나비족에 스파이로 잠입해 자원약탈을 원활하게 하는 것이 주인공 제이크 설리의 임무. 제이크는 나비족의 외형에 인간의 의식을 접합시켜 만들어낸 ‘아바타’를 통해 나비족에 침투한다. 그러나 제이크는 그들의 문화와 정신세계를 익히며 자원개발업자와 맞서 나비족과 판도라를 지키는 전사로 거듭난다는 거다.

<아바타>는 새로운 감각들을 일깨운다.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체험이다. 마치 주인공 제이크가 아바타를 통해 나비족을 체험하듯, 관객들은 영화 관람을 통해 인간의 판타지가 촘촘히 들어박힌 판도라에 발을 내딛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곳은 낙원, 신의 정원이다. 더럽고 추잡한 인간들이 악다구니를 펼치는 지상의 세계가 아닌 완전무결하고 순수한 파라다이스. 기기묘묘한 자연과 생물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제이크가 장자의 나비꿈을 오갈 때 관객들도 자문하게 되는 거다. 비루한 현실과 환상적인 아바타의 세계, 어느 쪽이 꿈인지. 영화를 보고 난 관객들이 아바타 우울증에 시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좀 챙겨 본 이들이라면 흥미로운 설정들에 눈을 반짝였을 만하다. 제이크가 아바타에 들어가는 ‘링크’ 시스템은 에반게리온의 신지가 에바와 싱크로율을 높여가는 과정과 판박이다. 하늘 위에 솟아있는 ‘할렐루야 산’들은 천공의 섬 라퓨타를 즉각 떠올리게 하고, 나비족이 자연과 나누는 교감은 원령공주나 나우시카를 즉각 연상시킨다. 이런 소소한 ‘레퍼런스’를 발견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몇몇 SF작품들에 대해선 표절논란까지 일고 있는 걸 보면, 아마도 SF 팬들은 더 많은 설정에서 발견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아바타>가 기존의 영화를 기술적으로 극복한, 영화를 넘어선 영화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만큼 아쉬움이 없지 않다. 몰입을 위해서는 익숙하고 단순한 이야기구조가 필요했겠지만, 백인이 이민족의 영웅이 되어 그들을 구한다는 인종차별주의 논란을 생각하자면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 전개 역시 뻔한 구석이 있다. 영화를 보며 제이크가 ‘투르크 막토’(나비족의 전설적 영웅)가 되어 판도라를 구할 거라 생각하지 못한 사람 손? 이런, 손든 친구들은 아직 세상경험이 일천한 듯하니 영화 좀 더 챙겨 보시고. 오리엔탈리즘의 변주로 의심할 만한 구석이 없지 않다는 것도 맘에 걸린다. 나비족은 인디언이나 아프리카의 원시인을 떠오르게 한다. 이들의 자연주의 철학 역시 비서구권의 사상(이라 여겨지는 일련의 정신적 태도들)과 유사점을 보이고, 한편으로는 만신론을 읊조리는 듯도 하다. 나비족의 때묻지 않은 순진함과 인류의 야비하고 무자비한 속성을 이분법적으로 극대화시키는 것도 불편하다.

설정에서도 이런 약점은 드러난다. 판도라 행성은 지구에서 무려 4.4광년이나 떨어진 행성이다. 그곳은 중력도 지구와 다르고 대기의 성분도 다르다. 인간이 대기에 노출되면 4분 내에 죽는다. 이런 환경에서 생존해 온 나비족은 키가 좀 크고 피부색이 다르다는 걸 빼면 눈코입마저 인류를 빼다 박았다. 아니, 그것까지도 괜찮다. 제이크와 네이티리가 애정을 표현하는 씬은 보기에 거북하다. 한 지구 내에서도 애정표현의 방식이 서로 다른데, 안드로메다를 건너 만난 외계인과 나누는 키스와 관습화된 성적 표현은 변형된 이성애자 남성의 판타지로만 느껴져 살짝 짜증을 돋운다.

그러나 진부하기 짝이 없는 스토리라인이야 말로 영화의 전략이다. 최대한 익숙한 설정에 얹어놓는 첨단 시각효과야 말로 관객들의 싱크로율을 극대화한다는 것을 제임스 카메론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긴, 카메론은 키아로스타미도 아니고 큐브릭도 아니다. 블록버스터 영화로 인류학 논문을 쓰거나 철학원론을 쓸 필요는 없는거다. 앞서 몇 가지 잔짜증을 부렸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어지간히 촉수를 세우지 않는 이상 당신은 아바타의 세계에 단지 매혹될 것이다.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 당신은 이미 기계 안에 발을 딛은 것이다. 안경을 착용하는 순간, 링크는 시작된다. 이제, 아바타가 눈을 뜬다. I See You.

※ 관람 후 머리가 아픈 것이 새벽 5시 반부터 시작된 긴 하루 덕인지, 제이크의 아바타 링크로 인한 고통(혹은 후유증)을 무의식중에 흉내내는 것인지 헷갈렸다. 나만이 아니었나보다. ‘아바타 두통’을 겪는 이들의 이야기가 뉴스에 실렸다. ‘불균형한 시각 정보로 뇌가 혼란을 느껴 일어난 두통’이란다. 하긴, 라디오에서 TV로, 흑백에서 칼라로, 2D에서 3D로의 변화는 수용과정의 육체적 피로도를 증가시켜 온 경향이 있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호들갑을 떨만한 이야기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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