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중후반 <디아블로>라는 게임이 등장했다. 게임 마니아라면 잘 알겠지만 <디아블로>는 <스타크래프트>, <워크래프트> 시리즈 등과 함께 ‘블리자드’를 세계 게임 시장의 중심에 올려놓은 성공작이었다. 10년도 더 지난 게임이어서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미흡한 점이 적지 않은 게임이지만 출시되었던 당시 이 게임은 대단히 획기적이었다. 거의 최초의 실시간 액션 롤플레잉 게임이었을 뿐만 아니라 온라인 요소가 본격적으로 결합되어 게임 안에서의 변수를 획기적으로 확장시켰기 때문이다. 시청각적 실감과 게임 시스템의 편의성도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다. 이런 <디아블로>의 장점을 한국적 게임 상황에 적절히 적응시킨 것이 <리니지> 성공의 원인이라고 하겠다.

때마침 그 무렵이 필자가 한창 게임을 많이 하던 때라 숱한 밤들을 <디아블로>에 매달려 보냈다. 지금과 달리 가정용 전화선을 이용하여 인터넷 접속하던 때라 온라인으로 즐긴 적은 거의 없지만 싱글 미션만으로도 충분히 흥미진진했다. <디아블로>의 진행은 지극히 단순한데 저주 걸린 왕국으로 돌아온 ‘내’가 악마 ‘디아블로’를 물리치기 위해 왕국의 심장부의 던젼으로 한층 씩 내려가는 것이다. 매층마다 각종 마물들이 그득하고 한바탕 물리치고 나면 각층의 보스격인 마물을 물리치게 되고 그러면 다음 층이 열리는 방식이었던 것 같다. 물론 롤플레잉 게임답게 전투가 거듭될수록 ‘나’의 능력치는 향상되었고 착용하는 아이템도 좋아졌다. 최종보스인 디아블로를 물리치기 위해선 16층까지 내려가야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공략집도, 치트키도, 에디터도 안 쓰고 정공법으로 진행했던 탓에 수차례의 시행착오 끝에야 엔딩을 볼 수 있었다. 그 새벽에 느낀 희열은 여전히 생생하다.

▲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신작 '아바타' ⓒ 폭스코리아

영화 <아바타>에서, 주인공이 초반부 ‘아바타’에 링크되어 ‘판도라’ 행성의 밀림을 불안과 호기심 속에 걷고 있는 모습에서 뜬금없이 십수년전 몰두했던 게임 <디아블로>가 떠올랐다, 물론 영화처럼 전 신경이 링크가 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처음 던젼에 들어가 조심스럽게 어두운 길을 헤매던 나의 첫 번째 ‘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게임을 진행했던 시간은 주로 심야나 새벽 시간이었고 장소는 혼자 사는 자취방이었기 때문에 사방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했다. 그런 상황에서 게임에 몰입하다보면 어느 순간 마우스와 키보드질을 하는 실제의 나와 칼(혹은 활이나 마법지팡이)을 들고 던젼을 헤매는 모니터 속의 ‘내’가 거의 하나로 동일시를 느꼈던 순간이 분명히 있었다. 일종의 링크가 이뤄졌던 것이다. 그렇게 며칠을 중독된 채 게임에 빠져 있다보면 모니터 밖의 현실과 모니터 안의 가상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감각이 들 때가 있었다. 물론 그런 감각은 게임의 종료와 더불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늘 엔딩을 보고 게임에서 빠져나오는 순간의 허탈감은 털어내기 힘들었다. <디아블로> 세계와의 링크가 끝나면 IMF를 처절하게 겪고 있는 불안한 20대 중반으로 돌아가야 했으니 말이다.

<아바타>는 과거의 <매트릭스>나 <공각기동대>와 같이 가상 공간의 체험을 그린 영화가 아니지만 오히려 (PC건 게임 전용 플랫폼이건)게임의 비약적 발전을 온몸으로 체험했던 세대들에게 강력한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영화다. 왜냐하면 모든 게이머들이 바라는 궁극의 게임, 즉 게임 자체가 현실이고 현실이 게임이 되는 세계를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시작 부분에서 전쟁에서 다리를 잃은 주인공 제이크가 아바타에 링크되어서 가장 먼저 시도하는 행동은 ‘질주’다. 게임이 주는 가장 큰 매력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능력을 준다는 점이다. 경영 시뮬레이션 게임에선 백수인 스스로를 굴지의 재벌로 만들 수 있고, NBA농구 게임에선 운동신경 빵점인 ‘내’가 360도 회전덩크가 가능해진다. 다른 대원들과 달리 제이크가 아바타에 보다 깊이 빠져드는 것은 당연하다. 영화에 자세하게 묘사되지는 않지만 제이크는 현실에서 기대할 것이 없는 인물이다. 그레이스 박사 같은 고학력의 과학자도 아닐뿐더러, 쿼리치 대령 같은 강건한 육체의 군인도 ‘더 이상은’ 아니다. 고작해야 연금으로 연명해야 하는 불구의 퇴역 군인일 따름이다. 그에게 아바타와 판도라 행성이라는 신세계가 주는 매력이 치명적인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사실 제임스 카메론이 과거 만들었던 영화들이 대부분 그렇듯 이 영화 역시 서사의 측면에서 보자면 익숙한 클리세의 조합으로 일관하고 있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기업이 하나의 권력을 형성하여 과도한 이윤 창출을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설정은 80년대 SF물인 <로보캅>이나 <에일리언>, 나아가서는 70년대 <롤러볼> 같은 영화를 통해 이미 익숙해진 것이다. 제이크가 나비족 처녀 네이티리를 통해 원주민 부족과 만나면서 타 문명에서 온 침략자에서 원주민들을 보호하는 ‘수호자’로 변해가는 설정 역시 수정주의 서부극 이래 지겹도록 봐온 모습이다. 생태 만물과 교감하는 나비족의 자연친화적 삶과 거대한 식물을 통한 생태적 네트워크는 미야자키 하야오 전성기 애니메이션에서 반복되었던 주제이다. 평화적 과학자 그레이스와 폭력적 군인 쿼리치의 대립 또한 너무 전형적 설정이며 심지어 기업과 군인에 맞서는 그레이스 역에 <에일리언>의 영웅 시고니 위버(<에일리언> 시리즈에서 그녀의 가장 큰 적은 본질적으로 에일리언이 아니라 그것을 무기로 삼고자 하는 군산복합체였다)가 캐스팅되었단 것 자체가 너무 노골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카메론은 늘 그렇듯 아주 전형적인 설정들을 적당하게 버무려낸 셈이다. 게다가 네이티리와의 로맨스에서 보여주는 과잉된 감상주의는 손발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측면이 있고 몇 가지 설정은 개연성이 떨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그저 그런 클리세의 조합에 CG를 엄청나게 쳐바른 연말연시용 블록버스터’ 정도로 치부하기는 힘들다. 이 영화의 매력은 다소 진부한 서사가 아니라 아바타라는 물질적 존재와의 링크를 통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중첩을 만들어 내는 영리한 설정과, 3D게임 한 가운데로 관객들을 입장시키는 테크놀로지의 힘에 있기 때문이다.

도입부에 제이크는 6년간의 긴 우주비행 동안 수면캡슐 때문에 꿈을 꾸지 못했다는 독백을 하고 있다. 수면캡슐에서의 잠은 강제된 마취였기 때문이다. 반면 판도라 행성에 도착한 이후 제이크는 링크를 통해 현실화된 꿈을 꾸기 시작한다. 수면캡슐에서의 잠이 억압이라면 링크기계에서의 잠은 해방이다. 과학자들은 관찰을 위해 그가 링크에서 깨어났을 때 셀프카메라를 찍게 하는데 그와 아바타의 존재는 점점 경계를 잃고 뒤섞여 간다. 돈 혹은, 잃어버린 다리를 얻기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어느 순간 목적 자체가 희미해져 버린다. 아바타로서의 삶이 지속될수록 진짜 인간으로서의 삶은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언젠가는 깨어나야하는 꿈이거나 언젠가는 빠져나와야 할 게임 같은 상황이지만 꿈에서 깨고 싶지도, 게임을 끝내고 싶지도 않다. 아바타로서의 삶에는 평화로운 낙원과 사랑스런 연인이 있는데 아무리 제 아무리 쿼리치가 험악하게 주먹질을 하며 꿈에서 깨라고 해도 들을 턱이 있나. 누구나 한번 쯤은 절대로 깨기 싫은 꿈을 경험해봤을 테니 제이크의 심정이 어느 정도는 이해 될 것이다.

대부분의 환몽담은 언제나 주인공이 현실로 돌아오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꿈은 단지 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바타>에서의 꿈은 그 자체가 물질적 현실이다. 게다가 친절하게도 그레이스 박사의 죽음 덕분에 영원히 깨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암시된다. 깨지 않아도 되는 꿈이면서 접속을 끝낼 필요가 없는 궁극의 게임이 가능해진 것이다. 자기 신체가 부여했던 본래의 정체성 따위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 본래의 정체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 역시도 이미 폴 버호벤의 <토탈리콜> 등에서 지겹도록 보여준 바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완전히 새로운 것은 전혀 없지만 충분히 매력적이기는 하다. 입체화된 감각적 강렬함에 보다 익숙해진 3D 게임 산업 전성기에 성장한 세대들에겐 더욱 그럴 듯 하다. 인간 세계를 그린 부분을 몰라도 최소한 꿈 같이 다가온 나비족 마을에서의 삶을 그린 부분에서는 그런 게임의 동영상 같은 질감이 확연히 느껴졌다. 이처럼 감각적 체험에 보다 치우친 영화에서는 상당히 전형화된 ‘뻔한’ 서사구조가 오히려 나은 점도 있다. 온전히 감각적 체험에 집중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 3D 입체영상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기회가 된다면 그런 방식으로도 다시 한번 체험해보고 싶은 생각도 솔직히 든다. 만약 그렇게 체험한다면 판도라 행성의 밀림 속을 헤매는 제이크 발걸음에서 <디아블로>가 아닌 <둠>(고전 3D 액션 시뮬레이션 게임)을 처음 접했을 때의 감각이 되살아나지 않을까. ‘영화의 미래를 보여준 작품’이라는 말은 과장되었지만 게임이건 또 다른 형태의 무엇이건 간에 다양한 부가가치를 창출할 가능성이 담긴 상품인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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