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보수를 개혁하겠다던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는 최악의 위기를 맞이하게 될 모양이다. 바른정당 소속 의원 14명이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와 회동을 하고 집단탈당 압력을 높였기 때문이다. 이미 탈당을 선언한 이은재 의원을 포함하면 최대 15명의 의원이 이탈하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바른정당 소속 의원은 18명까지 줄어들어 원내교섭단체로서의 지위를 잃게 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바른정당 소속 의원들이 유승민 후보에게 ‘3자 단일화’를 요구할 때부터 이미 예상됐다. 2018년 지방선거에 대응해야 할 일선 조직들이 자유한국당으로의 복귀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는 볼멘소리가 나온 지 오래다. 국회의원들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재선’을 위해서는 2018년 지방선거에서 승리하는 게 필수다. 그런데 같은 지역구에서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이 경쟁하는 구도로는 승산이 크지 않다. 이 결과는 2020년 ‘보수의 궤멸’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사실상 자유한국당으로의 복귀만이 답인 것이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응하지 않을 거라는 점을 고려하면 결국 이들의 ‘3자 단일화’ 요구는 자유한국당 복귀를 위한 징검다리일 뿐인 셈이다.

유승민 후보는 이런 흐름을 거부하고 있다. 정치공학적으로 보자면 무슨 배짱인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1일 경향신문은 유승민 후보가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을 통해 공공기관과 금융기관에 인사 청탁을 하려 했다는 의혹을 보도했다. 의혹이 사실에 가까워지면 후보 사퇴를 해야 할 수도 있는 사안이다. 차라리 ‘보수단일화’라는 명분을 갖고 명예롭게 퇴장하는 게 장기적으로 이로운 일이 아닌가.

유승민 후보가 정치공학을 거부하는 이유는 결국 ‘신념’이다. 유승민 후보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우리는 뜻을 품었고 그 뜻이 옳다고 믿는다. 시작은 언제나 작고 미미하지만, 그 길이 옳은 한 끝은 창대하리라. 나 유승민은 끝까지 간다”라고 썼다. 여러 상황이 불리하지만 애초에 내건 이념적 지향을 지키겠다는 선언이다.

바른정당 유승민 대선후보가 1일 서울 여의도 의원회관 의원실을 나서며 취재진과 인터뷰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실 따지고 보면 애초 보수단일화의 명분을 만든 것은 유승민 후보 자신이다. 그는 바른정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남경필 경기도지사와 경쟁하면서 보수단일화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당시는 자유한국당이 홍준표 후보를 선출하지 않은 때였다. 유승민 후보가 단일화를 명시적으로 거부하기 시작한 것은 홍준표 후보가 경남도지사 보궐선거를 막기 위해 ‘꼼수 사퇴’를 현실로 만든 즈음이다. 홍준표 후보의 행위가 자신이 주장하는 ‘새로운 보수’의 가치에 걸맞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홍준표 후보가 ‘새로운 보수’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평가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성완종리스트 사건으로 재판을 받는 중이다. 1심은 유죄가 나왔고 2심은 무죄가 나왔다. 일각에서는 홍준표 후보의 대선 출마 배경에 이러한 법적 문제에 대한 고려가 있다는 지적을 내놓기도 한다. 또, 홍준표 후보는 또 젊은 시절 ‘돼지흥분제’ 등을 동원한 성폭력 모의를 주동했다는 회고를 자서전에 써서 논란을 일으켰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모든 수단을 귀족노조나 성소수자를 억압하고 탄압하는 것에서 찾겠다고 하는 등 최소한의 자유주의적 양식을 갖추지 못한 인물로서의 약점을 그대로 드러내왔다.

유승민 후보는 그동안 “보수가 바뀌면 대한민국이 바뀐다”고 주장해왔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현실에서 보수정치가 뿌리 깊은 반공의식을 바탕으로 기득권의 착취를 정당화하는 기만적 체제를 만들어왔다는 점을 보면 결국 보수의 변화는 원칙을 다시 세우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유승민 후보가 주장해온 정의와 공화주의는 바로 이런 점에서 대단히 가치지향적인 정치 슬로건이다. 현실정치가 이러한 슬로건을 오직 기만을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로서만 내세워왔다는 점을 돌이켜보면, 유승민 후보의 주장은 분명 경청할만한 가치가 있다.

물론 좋은 주장을 내놓는다고 해서 반드시 선거에서 높은 지지율을 얻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이를 감수하고 자신의 주장을 고수하는 모습은 오늘날의 정치에서 잊혀진 모습이라는 것 또한 분명하다. 이에 비하자면 홍준표 후보와 자유한국당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사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기만적 정치의 대표자들이다.

1일 밤 바른정당 유승민 대선후보가 페이스북에 남긴 글. (연합뉴스)

사실 이념을 사익에 들러리 세우는 행태는 오늘날 한국정치의 일반적 모습이다. 최근의 예는 야권이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분리된 사건이다. 국민의당은 더불어민주당과의 이념적 차이 때문에 분화된 정당이 아니다. 국민의당은 분당을 정당화하기 위해 ‘친문패권주의’를 말하지만, 이는 공천 등 개별 의원들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이지 국민의 삶을 좌우하는 정치의 이정표에 영향을 미칠 만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바른정당은 정의당을 비롯한 진보정당들을 제외하면 근 10년 간 이념과 노선의 차이를 근거로 해서 기득권에서 떨어져 나온 거의 유일한 제도권 정당으로 평가할 수 있다.

유승민 후보가 사퇴하거나 사실상 주저앉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모범적 시도가 무위로 돌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분명 유승민 후보는 오류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앞서 언급한 사안 외에도 대북문제에 대해 불필요한 비이성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는 건 큰 문제다. 그러나 새누리당을 나와 바른정당을 만든 애초의 의도가 훼손되는 일이 벌어진다면 유승민 후보를 중심으로 한 ‘개혁적 보수’를 자처하는 세력이 한국 정치에 끼칠 수 있었던 최소한의 긍정적 영향도 사라진다는 걸 뜻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정치가 정치적인 방식으로, 그야말로 정치답게 돌아가는 한국 정치 체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당장의 이익만 따지고 이상과 명분을 기만적으로만 소비하는 일체의 정치적 행태로부터 결별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바른정당 일부 의원들이 유승민 후보를 이런 방식으로 흔드는 건 정치의 퇴보라는 평가를 피해갈 수 없다. 당장은 정치적 목숨을 건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보수정치는 극우정치에 점거 당한 상태로 유지될 것이다. 홍준표 후보와 회동한 의원들이 이런 상황을 만든 사람들로 결국 역사에 남고야 말겠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