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11월 26일) 제기동 성당(서울 동대문구)에서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비자금 사건 4차 기자회견을 열고 삼성그룹 계열사들이 수 조 원의 분식회계를 통해 비자금을 조성하고 조성된 비자금으로 고가의 미술품을 구매했다는 충격적인 폭로를 이어갔다. 또한 1997년 대선 당시 삼성의 정관계 로비기록을 담고 있었던 ‘X파일’의 원본 테잎을 당시 중앙일보가 구매하기 위한 흥정에 개입했던 새로운 사실도 제시했다. 그는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중앙일보의 실제 소유가 여전히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기 때문이며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이면 계약서의 존재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 경향신문 11월27일자 1면.
이날 기자회견에서 김 변호사는 그동안 자신이 폭로한 ‘사실’을 보도하고 있는 언론에 대해서도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김용철 변호사가 전하는 ‘불편한 진실’

“내가 말하는 것을 ‘주장했다’고 오늘자 신문에도 보도됐던데, 난 주장하는 것 하나도 없다. ‘사실’만 말한 것이다. 주장을 하고 논쟁하자는 것 아니다. 공개적으로 수사요구 하니 검찰이 수사해서 결과를 발표하고, 언론인들은 취재하면 되는 것이다. 내 검증은 그만해 달라.”

“노래방 퇴폐 불법영업으로 보도한 중앙일간지들에 대해 난 대응하지 않았다. 법조 대선배는 (내가 사는) 콘테이너 박스를 별장이라고 했다. 심지어 법률신문 기자도 (내게) ‘삼성으로부터 받은 급여 사회 환원하라’고 했다. 내 받은 돈 100억 안 넘는다. 세금 내고 나서 학교에 기증하기도 했다. 내게 별로 없다. 그런데 이야기도 제대로 못한다. 내가 여러분보다 낫다. 이런 얘기하는 것 정말 가슴 아프다. 달 안 보인다고 손가락 본다고 하지 말라. 난 가족과 내 운명을 걸고 하는 것이다. 심지어 주류세력인 조선일보를 상대로까지 소송하겠다고 하겠는가. 전선 분명히 한다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하겠느냐.” (삼성 비자금 사건 4차 기자회견 중 김용철 변호사, <미디어 오늘> 2007. 11. 26)

김 변호사는 처음 시사인과 한겨레신문에 삼성 비자금 문제를 폭로하면서 이미 이런 상황을 정확히 예측한 바 있다. 즉, 그의 도덕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각종 의혹과 루머를 통해 그가 폭로하고 있는 사실 자체의 진실성을 훼손시키려는 시도가 극성을 부릴 것이고 또한 그의 폭로 사실을 언론이 단지 ‘확인되지 않은 개인의 주장’으로 폄하할 것이라고.

그가 예측한 대로 일부 신문들은 삼성 비자금 관련 폭로 이후 그와 관련된 악의적 소문들을 기사화하거나 칼럼 형식으로 게재하였고, 이를 통해 그가 폭로한 ‘사실’들의 진실성을 노골적으로 또는 우회적으로 의심스러운 것으로 비틀었다.

삼성은 이날 기자회견이 끝나자마자 준비된 보도자료를 통해 김 변호사의 폭로 사실을 전면 부정했으며, 중앙일보는 삼성의 반박자료 중심으로 관련기사를 배치하고 타 언론에 비해 훨씬 적은 지면만을 할애해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의 ‘BBK 주가조작 사건’의 역풍이었을까? 김 변호사가 가장 우려했던 삼성 비자금 문제와 불법 승계 의혹 사실의 은폐 가능성은 이제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축소와 왜곡, 그리고 조작의 개연성은 상존하지만 적어도 검찰은 검찰 수뇌부까지 연루된 이 폭로 사건을 다루기 위해 나름 비중 있는 특별수사감찰본부를 구성했을 뿐 아니라 김 변호사의 기자회견이 있던 이날 이건희 삼성그룹회장과 핵심임원 7~8명의 출국금지라는 전격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게다가 여론에 떠밀린 국회는 예상보다 훨씬 빨리 삼성특검법안을 의결했다. 청와대의 거부권 행사라는 다소 복잡한 변수가 있긴 하지만 적어도 사건 수사의 단초는 확실히 잡은 셈이다.

중앙일보, 삼성 반박자료 중심으로 지면 구성

▲ 중앙일보 11월27일자 6면.
그렇다면, 이제 남은 과제는 김 변호사가 폭로한 사실에 대한 검찰의 진실규명과 이러한 진실규명 과정을 언론이 얼마나 정확하고 충실하게 전달할 수 있는 가로 모아진다. 이에 따라 언론이 여전히 김 변호사의 개인의 ‘주장’으로 전하고 있는 그의 폭로가 ‘사실의 전달’인지 단지 ‘주장’일뿐인 지의 여부도 판가름 날 것이다.

언론 보도에서 ‘사실’과 ‘주장(또는 의견)’을 분리하여 보도한다는 것은 사실 일종의 신화일 뿐이다. 독자와 시청자들이 신문과 방송을 통해 접하는 모든 ‘사실’은 취재기자가 자신의 이성과 판단에 의해 재구성한 ‘사실의 재현’일 뿐이다. 즉 어떤 식으로든지 취재기자의 관점이 개입될 수 밖에 없으며 때때로 직접 취재현장에 있지 않았던 취재 데스크의 관점까지 개입되기도 한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자면 모든 언론은 사실과 주장을 동시에 전달한다.

물론 우리나라 대부분의 언론사들은 여전히 ‘사실’과 ‘주장’을 분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때때로 그들의 ‘주장’을 그럴싸한 ‘사실’로 포장하기도 하고 종종은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 내용과 같은 ‘사실적 주장’을 신뢰하기 힘든 개인의 생각과 의견 정도로 폄훼해버린다. 어제의 기자회견에 대한 오늘 아침 다음 두 개의 기사제목은 ‘사실’속에 어떻게 그런 ‘주장’이 담길 수 있는 지 잘 보여준다.

한겨레 <“삼성물산이 비자금 통로…해외법인서 2천억 조성”>
매일경제 <김용철 최후의 폭로, 근거는 여전히 미흡>

▲ 한겨레 11월27일자 1면.
한겨레는 김 변호사의 주장을 인용을 통해 그대로 제목으로 옮겨놓은 반면, 매일경제는 ‘근거가 미흡하다’는 그들의 주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 매일경제 11월27일자 39면.
대안언론을 키워야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언론의 교묘하게 ‘사실 속에 숨긴 주장’과 김 변호사의 폭로와 같이 ‘사실이 담긴 주장’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사실 취재현장에 있는 기자들조차 매번 이에 대한 정답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없다. 이번 삼성 비자금 관련 보도를 제일 처음 시작한 한겨레신문과 시사인과 같은 정론지, 황우석 사태의 진실을 끝까지 밝혀낸 프레시안과 같은 인터넷 언론, 그리고 우리사회에 새로운 녹색 시선을 제공하는 녹색평론과 같이 어떤 사실과 주장에 대해서도 숨김없이 치열하게 진실을 발굴해내는 언론을 키우는 수밖에. 이 방법 또한 한가지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 이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들이 매월 지갑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만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대학시절의 고민을 놓치 못한 채 공영방송에 입사했지만, 공영방송에서 조차 이 고민을 다 담지 못하고 이제 두 딸아이의 미래를 위한 나름의 헌신과 실천을 고민하는 생태주의자 ‘고니아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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