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도형래 기자] 세계노동절을 맞아 자살과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방송·통신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과 처우 개선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통신 노동자들은 거대 통신사에 얽매인 도급과 하청 구조 아래서 비오는 날 전신주에 올라야할 만큼 일상적 위험에 노출돼 있고, 콘텐츠 노동자들은 화려한 카메라 뒤에서 살인적인 노동 강도에 신음하고 있다. 지역 지상파 방송 노동자들 역시 경영 악화로 정리해고의 위기에 내몰렸다.

문재인, 안철수 등 유력 대선 후보들은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며 방송·통신을 다음 세대를 위한 먹거리라고 말하지만, 정작 방송·통신 노동자들과 노동 환경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잇단 추락·감전 사고…위험에 노출된 통신사 현장 기사들

지난해 말 인터넷 설치 기사의 추락 사고가 잇따라 발생했다. 지난해 9월 SK브로드밴드 외주 업체 현장기사가 비오는 날 전신주에 올라 인터넷 설치 작업을 하다가 추락해 사망했다. 같은 달 진주에서도 SK브로드밴드 현장기사가 인터넷 설치 작업 중 감전으로 추락해 척추를 다치는 사건이 있었다.

잇단 사건 사고로 비판의 대상이 된 SK브로드밴드는 개인 도급제 현장 기사를 외주사 정규직으로 전환했고, 다른 통신사 역시 정규직화 추진을 약속했다.

하지만 통신사의 외주사 정규직 전환은 사회적 비판을 피해가기 위한 기만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희망연대노조 LG유플러스 비정규직지부 최영열 지부장은 “명목상 정규직 전환일 뿐”이라고 밝혔다.

최영열 지부장은 “근로계약서를 쓰고 있지만 계약서에 노동시간도 없고, 임금 항목도 없다”며 “임금 체계나 구조가 변하지 않아 실질적인 고용안정이 없다”고 지적했다. 사측이 사회적 비판을 피하기 위해 4대보험만 가입해 놓고 기존의 도급 체계나 단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얘기다.

또 최영열 지부장은 “임단협 기간 중이지만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며 “공식적인 협상도 없다. 비공식적으로 전화해서 싸인만 하자고 한다”고 밝혔다.

통신사 인터넷 설치 기사 (사진=희망연대노동조합)

‘해지 방어’ 업무…욕받이로 내몰린 콜센터 직원들

통신사 콜센터 직원들의 과도한 감정노동 역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지난 1월 LG유플러스 고객센터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여고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사망 실습생은 콜센터에서 ‘해지 방어’ 업무를 하며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려온 것으로 추정된다.

실습생 공동대책위는 “콜센터 ‘해지 방어’ 부서는 고객센터 내에서도 가장 인격적 모독을 많이 당하는 '욕받이' 부서”라며 과도한 감정 노동, 업무상 스트레스의 문제를 지적했다.

또 대책위는 "고객센터 상담노동자가 감정적 소진을 겪으며 우울증, 사회심리 스트레스 등 각종 질병 요인에 노출됐다"며 업무상 재해로 인정해 달라는 취지의 산재 신청을 접수했다.

지난달 13일 LG유플러스 고객센터 특성화고 현장실습생 사망사건 진상규명 대책회의가 LB휴넷 본사 앞에서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미디어스

수직적 위계…콘텐츠 제작자, 서로가 서로를 착취해

콘텐츠 생산 단위의 과도한 노동 역시 하루 이틀의 문제는 아니다. 총연출, 연출, 조연출, 스텝, 외주사로 이어지는 수직적 업무 구조는 서로가 서로를 착취하는 구조다.

지난해 10월 CJ E&M ‘혼술남여’ 제작에 참여했던 고 이한빛 PD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한빛 PD는 하루 20시간이 넘는 살인적 노동 강도와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직장 내 언어폭력으로 괴로움을 호소해 왔다. 또 자살 배경에는 촬영, 조명 등 외주 업체를 관리하고 이들의 외주 계약 해지 지시를 떠맡으며 이한빛 PD가 받은 양심의 가책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됐다.

고 이한빛 PD의 동생 이한솔 씨는 CJ E&M 본사 앞에서 1인 시위 자리에서 “누가 죽었는데도 바뀌지 않는 게 더 안타깝다”며 “구조조정이나 노동착취 등 사람에 대한 존중 없는 문화가 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tvN ‘혼술남녀’ 신입조연출 사망사건 대책위원회는 지난 달 24일, CJ E&M 본사 앞에서 CJ E&M의 책임 인정과 사과·재발 방지 대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미디어스)

지상파 노동자들도 피할 수 없는 ‘정리 해고’

지상파 방송 노동자들 역시 정리해고의 위기에 내몰렸다. OBS경인TV는 지난달 14일 직원 13명의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정리해고에 노동조합을 비롯해 관련 언론단체와 인천지역 시민단체가 반발하고 있지만, 대주주의 영안모자와 백성학 회장의 전횡을 막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대주주 영안모자의 지분률은 40%에 달한다.

OBS의 정리 해고는 경영진의 잘못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긴 사례로 꼽힌다. OBS는 개국 10년 만에 자본금 1,400억원이 잠식됐고, 지난해 말 방송통신위원회로부터 ‘2017년까지 자본금 30억 증자’를 조건으로 1년짜리 ‘조건부 재승인’을 받았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지난달 25일 성명을 통해 "OBS 위기상황을 불러온 데는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최대주주와 경영진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며 "정리해고로 수익의 원천인 양질의 프로그램 제작 축소를 자행하는 것은 자해행위나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사람 쥐어짜고 죽음으로 내모는 구조를 바꿔야"

정의당 추혜선 의원은 1일 논평을 통해 “방송·통신 노동자들은 과도한 노동과 고용불안,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며 “방송·통신 산업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정부와 국회, 업계 모든 사업자들이 노동자들의 절규에 귀를 기울일 것”을 촉구했다.

추혜선 의원은 “노동자를 불안정한 고용과 실적압박으로 내몰수록 시청자·이용자 또한 ‘호갱’으로 전락하고 권리를 보호받을 수 없는 곳이 바로 방송·통신 산업”이라며 “대선 후보들이 방송·통신에 관해 장밋빛 공약들을 내세우고 있지만, 사람을 쥐어짜고 결국 죽음으로 내모는 구조를 그대로 둔다면 모두 허구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추혜선 의원은 우체국 노동자들의 과도한 노동에 대해서도 “최근 일주일 사이에만 집배원 곽 모 씨가 4월 25일 심근경색으로 숨진 채 발견됐고, 계리원 신 모 씨가 4월 26일 우체국에서 갑자기 쓰러진 후 심정지로 사망했다”며 “작년에 2달에 한 명, 올해 1달에 한 명 꼴로 과로사와 업무 중 교통사고 등으로 순직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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