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계는 냉정합니다. 진보한 디자인은 박수를 받지만, 진부한 디자인은 외면당합니다.”

어디 패션계만의 일이겠는가. 방송계 역시 냉정하다. 물론 방송계의 경우 ‘진보’ ‘진부’와는 상관없는 ‘시청률’이 주요한 잣대이기는 하지만.

여하튼 그렇게 냉정한 패션계가 시작이었다. 우리가 진보한 디자인, 진부한 디자인을 구별할 수 있는 미적 기준을 갖고 있는가는 모르겠으나,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이하 프런코)는 케이블방송으로 본방 시청률 2%를 넘으며, 어물쩡 2009년 케이블방송 시대의 화려한 서막을 열었다. 잠시, 고작 시청률 2%라고 비웃지 마라.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밤 12시 본방에 케이블 방송 시청률 2%는 지상파의 30%와 맞먹는다.

2004년 미국 브라보 채널에서 시작한 <프로젝트 런웨이>의 포맷을 정식으로 구매한 <프런코>는 말 그대로 <프로젝트 런웨이>의 한국판으로 리얼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일반인들이 참여하여 미션과 도전을 수행해가며 결국 최종 1명이 우승하게 되는 리얼 서바이벌 프로그램이었다. <프런코>는 불가능해보이는 화제와 관심을 획득했고, 도전에 참여했던 디자이너들의 뚜렷한 이름을 남겼다. 참고로 오는 2010년에는 <프런코 시즌2>가 방송된다고 한다.

<프런코>에서 시작된 케이블방송의 약진은 2009년 내내 이어졌다. 그리고 <슈퍼스타K>가 있었다. <프런코>에 이은 리얼 서바이벌 프로그램으로 기록적인 대히트를 기록한, 72만 명분의 1이라고 하는 유례없는 호칭을 얻은 ‘서인국’이라는 새로운 스타를 발굴한 바로 그 <슈퍼스타 K>. <프런코>에 비하자면 스케일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웅장해졌고, 평균 시청률은 <프런코>의 2배를 훌쩍 뛰어넘었다. <슈퍼스타K>의 최종 파이널에 오른 탑10의 이름들은 현재 웬만한 대형기획사 준비생 못지않은 유명세를 타고 있다.

2009년 케이블 방송 파워의 한 축에 리얼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있었다면, 다른 한 축은 지상파의 고정관념을 가뿐히 뛰어 넘은 재기 넘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시청자 입장에선 아닌 말로 “앗싸 가오리~ 횡재했어요~”를 외칠 수 밖에 없던 프로그램이었다. 현재, 광고는 물론 방송계 전체에서 유행되고 있는 그녀의 목소리와 어법, <롤러코스터>(이하 롤코)는 올 해 케이블이 낳은 최고의 프로그램이다.

‘남녀탐구생활’이라는 코너로 남녀 간의 사소한 차이를 진심 반, 오버 반으로 살짝 양념하고, 지상파에서 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특이한 말투와 솔직하기 그지없는 내레이션으로 숙성해 들어가니, 불가능해보이던 맛 아니 인기를 만들어냈다. 뭐 가끔 너무 억지 같은 남자 VS 여자 설정이 다소 눈에 거슬리기도 했지만, ‘남녀탐구생활’의 성우 언니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행복해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을 지어요’하고 있었다.

그랬다. <롤코>는 지상파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기획으로 승부하였다. 다소 경박해 보이고, 다소 유치해 보인다고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화성과 금성 사이의 남자 여자의 관계를 대놓고 적나라하게 이야기했다. <롤코>는 케이블의 기획이 단순한 틈새 공략을 아닌 보편적 ‘공감’이라는 감수성의 분모를 찾아내면 지상파를 압도할 수 있음을 확인케 했다. 무엇보다 그 동안 ‘저질’ ‘선정’ 등의 불명예를 안고 있던 케이블이 환골탈태할 수 있음을 포착한 순간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게다가 전통의 강자 <막돼먹은 영애씨>는 시즌 6에 돌입하며, 여전한 저력과 생각보다 훨씬 탄탄한 재미를 지속하고 있는 중이다.

미드, 일드 등 유명한 외국 드라마를 방영하거나 외국에서 수입한 프로그램을 반복적으로 틀어대고, 지상파 방송의 재탕 또 재탕. 행여 자체프로그램 제작이라고 했다는 것이 눈뜨고 보기 싫은 요상망측한 것들로 사람 심기 불편하게 한 케이블 방송이 드디어 썩 괜찮은 기획들과 프로그램으로 승부하기 시작한 즐거운 2009년이었다. 소박하게는 무엇보다 그냥 <프런코>에 <슈퍼스타 K>, <롤코> 까지 정말 훈훈했던 케이블 방송 덕에 간만에 리모콘 돌리는 맛이 좀 살았던 한 해였다. “앗싸, 가오리~ 횡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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