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이후, 예능의 주류는 언제나 ‘남성’이었다. 유재석과 강호동의 아성이 지금 같은 난공불락은 아니던 직전의 예능 춘추전국시대를 분할했던 이름들 역시 하나 같이 남성이었다. 물론, 여성들의 화려한 시절도 있었다. 신동엽, 탁재훈, 김용만, 이휘재, 남희석, 김제동, 이경규 등으로 예능의 소영주 시대가 이뤄지던 때에, 여성들은 여섯(여걸 식스) 혹은 다섯(여걸 파이브)의 무리를 이뤄 기꺼이 한 몫을 해냈었다.

그러나 유재석의 영리함과 강호동의 호방함이 천하를 재패한 이후 여성의 존재는 확연히 가련해졌다. 대표적 여성 예능인들이라고 할 만한 몇몇의 그녀들의 개인사가 우연찮게 겹치면서, 지상파 3사의 주요 예능 프로그램들은 노골적으로 남성 위주의 프로그램들로 재편되었다. 이 시점에 일가를 이룬 유재석과 강호동은 각각 <무한도전>과 <1박2일>을 통해 오로지 남자들만의 우정과 연대로 이뤄진 웃음을 뽑아냈고, 이후 예능의 주류는 어떤 면에선 <무한도전> 같은(<남자의 자격>, <천하무적 야구단>) 또 어떤 면에선 <1박 2일>같은(<패밀리가 떴다>)프로그램들로 채워졌다.

▲ 박미선
예능에 있어 여성들의 위상이 얼마나 추락했는가는, 그나마 가장 재능 있다는 여성 예능인들이 <무한걸스>와 <미녀들의 1박 2일>이라고 하는 지상파의 카피 포맷으로 케이블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에서 극적으로 증명됐다. 그것은 두말 할 나위 없이 ‘마이너’였다. <골드 미스가 간다> 정도가 지상파에서 선전했으나,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연속이었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울고 유행은 결국 진부함의 다른 이름인 것을. 2009년에 이르러 여성들은 무한히 도전하는 체력의 열세와 야생에서 버라이어티 정신을 외쳐야 하는 유격훈련스러운 포맷에 적응하지 않고도 대중과 교감할 수 있는 사랑방을 개설하는 데 성공했다.

올해 가장 발군의 활약을 보여준 우먼파워는 단연, 박미선과 이경실이었다. 80년대 데뷔하여 개그 경력을 ‘꽁트’에서부터 쌓아온 그녀들의 내공은 <세바퀴>에 이르러 완숙한 수다의 힘으로 절정을 맞았다. 세상을 바꾸는 퀴즈, 아니 수다를 표방하는 <세바퀴>의 믿기 힘든 질주는 전적으로 박미선, 이경실, 임예진, 김지선, 선우용녀로 대변되는 아줌마들의 미용실 사담을 방송에 끌어들인 기획의 승리였다.

물론, <세바퀴>는 기존의 예능 토크가 답습하던 연예인의 경험담(+주워 들은 재미난 이야기)과 홍보 위주의 패턴 자체에서 진화한 방식은 아니다. 하지만 기존의 토크와 <세바퀴>가 갖는 결정적 차별점은 세상을 보는 관점의 부분이다. <세바퀴>는 세상을 철저히 아줌마들의 시선으로 본다. 그건 잘생긴 남자 아이돌을 보면서는 어느 집 아들이기에 저리 훤칠한 가 뜯어보는 것이고, 예쁜 여자 아이돌이 나오면 마찬가지로 뉘 집 딸이기에 저리 재능이 많은 것이냐고 감탄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조형기를 보면 철없는 남편(혹은 아빠)의 주책을 환기하고, 김현철을 보듬는 모습에서는 어느 집에는 있을 법한 모자란 시동생(혹은 삼촌)을 떠올린다.

<세바퀴>의 분명한 성공에 이유가 있다면, 그런데 딱히 그 성공의 이유를 설명하기 힘들다면 그건 <세바퀴>의 성공이 여성적 감수성 그 자체로 가능하고 완성된 것이기 때문일 테다. 이건 유재석과 강호동은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성취이다. 박미선과 이경실, 임예진과 선우용녀의 세계 안에서 이휘재의 장가 문제는 여전히 대한민국 아줌마들의 공통적 관심사이고, 툭툭 내뱉는 김구라의 화법은 감싸 안아진다.

2009년 이경실과 박미선으로 대변되는 아줌마들이 <세바퀴>를 통해 그녀들만의 영토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면, 아직 아줌마가 될 수밖에 없는 그녀들은 경쟁과 경합의 각개약진을 통해 MC로써의 자리매김에 성공한 한 해였다. 대표 주자로는 신봉선과 김신영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 이경실
한 때, KBS와 SBS의 공개 코미디를 상징하는 여성 캐릭터였던 신봉선과 김신영은 버라이어티로 진출한 이래 게스트를 섭렵하며 차근한 성장의 과정을 밟았다. 그 둘의 시너지가 폭발한 것은 <무한걸스>의 ‘니나 내나’ 콤비를 통해서였다. 가장 전통적 웃음 코드인 ‘도토리 키 재기’로 미모를 뽐내던 그녀들은 올 한해 각각 서너 개의 프로그램들을 오가며 차세대 여성 MC의 거역할 수 없는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주목해야할 그녀를 꼽자면, <롤러코스터>의 히로인 정가은이었다. <무한걸스>에서 조차 방송 분량을 걱정하던 대표적인 예능 겉절이였던 정가은의 2009년은 그야말로 욱일승천, 로또 당첨의 한 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키 큰 송혜교로 불렸던 그녀는 어느새 제2의 현영이라 칭해질 정도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게다가 하반기에 정주리와 안영미가 무서운 기세로 치고 올라오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반면 올 해는 예능의 터줏대감, 대한민국 버라이어티의 명문가라고 할 만한 <일요일 일요일 밤에>가 완전히 쇠락한 한 해였다. 물론, 그 쇠락의 이유야 복잡한 것이겠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은 신동엽, 탁재훈, 신정환, 김용만, 이경규 등의 소영주 연합으로는 유재석, 강호동 왕조를 꺾을 수 없다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의 재확인이었다. 얼마 전 일밤에 복귀한 대한민국 최고의 예능 PD가 유재석과 강호동과 함께 할 수 없음의 고충을 말하며, 그래도 해야지 어쩌겠냐는 발언을 한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확실히 2009년 여걸들의 파워는 단순한 잠재력 이상의 의미와 웃음을 던졌다. 그렇게, 재능있는 여성들의 고군분투는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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