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묵은 ‘주적’ 논란이 대선판을 흔들고 있다. 지난 19일 KBS TV토론에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의 “북한은 주적인가”라는 물음에 “대통령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답한 이유 때문이다.

의외로(?) 젊은층이 문재인 후보 답변에 의구심을 갖는 경우가 많았던 걸로 보인다.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주적’이란 단어가 오랫동안 남아 있었던 걸 보면 그렇다. 군대에서 “북한은 주적”이란 규정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는데 문재인 후보가 이에 동의하지 않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니 당혹스러운 감정을 느낄 만도 하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선후보가 20일 강원도 원주시 중앙로를 찾아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북한은 주적인가”라는 물음은 겉보기에 “당신은 북한 편인가, 대한민국 편인가”라는 물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지금까지의 논쟁사다. ‘주적’이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적’이란 표현은 1994년 북핵 위기 속에서 처음 등장했다. 냉전 종식 이후 핵개발에 손을 댄 북한을 제어하기 위해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2년 한미 양국과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에 합의했으나 이를 통해 얻은 게 없다고 생각한 북한이 핵사찰을 거부하면서 위기가 고조됐다. 김영삼 정부는 북한의 이런 태도에 분개해 대북강경책으로 일관했고 이는 이른바 ‘통미봉남’을 초래해 미국이 북한 핵시설에 대한 직접적 타격을 모색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갔다. 바로 이 당시에 대북강경책의 일환으로 이뤄진 게 국방백서에 ‘주적’ 개념을 넣는 거였다.

이후 김대중 정부에서 남북관계를 개선하면서 6·15 선언 이후인 2001년부터 2003년까지 국방백서를 발간하지 않았고, 2004년 노무현 정부가 그간 논란이 된 ‘주적’ 표현을 국방백서에서 빼고 ‘군사적 위협’이라는 표현을 넣은 게 논쟁의 발단이다. 이후 2010년 천안함 폭침 이후 보수세력이 다시 ‘주적’이란 표현을 국방백서에 넣을 것을 주장했으나 국방부가 이에 난색을 표하면서 북한 정권과 군부를 ‘우리의 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절충한 게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명박 정부 당시 국방부의 반대 논리 중 하나는 ‘주적(主敵)’을 명시하면 ‘부적(副敵)’을 물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외교적으로 보면 중국, 러시아 등 구 공산권 국가들을 어떻게 볼지의 문제가 된다는 얘기다. 공식문서에 이런 식의 표현을 쓰는 국가가 흔치 않다는 사실도 제시됐다. 예를 들면 같은 분단국가였던 독일의 경우에도 서독이 동독을 지칭할 때 ‘군사적 위협’ 정도로 표현했다. 국가적 정통성을 겨루는 사이인 대만과 중국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맥락을 놓고 보면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할 말은 아니다”라고 답한 의미가 명확해진다. 그간 ‘주적’이란 표현은 그간 정치권에서 장기간 논란의 대상이 돼왔기 때문에 유승민 후보와 같은 정치권 인사들도 이런 맥락을 몰랐을 리 없다. 몰랐을 리 없는 걸 일부러 물어봤으니 ‘색깔론’이라거나 ‘사상검증’이란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놀라운 것은 국민의당이 이런 흐름에 가세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권에 입문한 지 상대적으로 오래되지 않은 안철수 후보가 ‘주적’이란 표현에 담긴 역사적 맥락을 몰랐을 수도 있다고 치자. 박지원 대표는 김대중 정부의 6·15 공동선언을 추진한 당사자 중 한 명이므로 이런 맥락을 몰랐다고 하기 어렵다. 그런데 박지원 대표는 20일 “엄연히 국방백서에는 주적이 북한”이라면서 “문재인 후보가 주적(을 묻는 질문)에 답변을 못한 것은 마치 대통령이 되면 미국보다 북한을 먼저 가겠다는 것으로, 안보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놀라운 일이다.

박지원 대표가 이렇게 말하는 공학적 이유는 추측이 가능하다. 최근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 등 구 여권 계열 정당은 “안철수 찍으면 박지원이 상왕 된다”는 논리를 유포하고 있다. 영남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유권자 층의 인식 속에서 박지원 대표는 ‘친북적’이라는 딱지가 강하게 붙어있는 인물이다. 그러니 박지원 대표 입장에선 그렇지 않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보여주기 위해 발언을 더 강하게 한 측면이 있을 걸로 추정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보수적 유권자 층의 득표를 색깔론을 통해 강화하겠다는 심산인 셈이다. 이런 생각은 박지원 대표 혼자만 하는 게 아닌 것 같다. 지난 18일 안철수 후보 측 상임선대위원장을 맡고 있는 손학규 전 의원은 대구에서 유세를 하던 도중 “문재인을 찍으면 누구한테 먼저 가는가? 김정은이다. 그거 되겠는가”라고 발언했다. 이른바 ‘문찍김’의 수위를 낮춘 버전인 셈이다.

이런 행보는 문재인 후보를 꺾기 위해서 보수적 유권자층의 지지에 기대야 하는 안철수 후보의 입장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안철수 후보는 20일 당선될 경우 ‘통합 내각’을 꾸리겠다는 게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 소속 인사도 등용하겠다 의미냐를 묻는 질문에 “문제를 해결하는데 가장 최적의 인재가 다른 당에 있다면 그 사람을 쓰겠다”고 답했다. 이 역시 마찬가지다.

국민의당 안철수 대선후보가 20일 오후 서울 중구 퇴계로 남대문시장에서 시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제는 이런 행보를 강화하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유권자 층의 지지가 하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대선판에서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 사이를 오가는 ‘진보적 유권자’란 사실상 호남 지역의 표심을 말한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호남 지역 유권자들의 표심은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로 양분돼 있는 걸로 확인됐다. 이런 상황에서 안철수 후보가 사실상 ‘보수 후보’로 각인된다면 표심은 문재인 후보 쪽으로 쏠릴 수 있다. 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안철수 후보 측 진영이 내놓은 답은 ‘지역감정’인 것 같다. 박지원 대표는 지난 17일 전주에서 “문재인은 대북송금에 관한 특검을 통해 우리 김대중 대통령을 완전히 골로 보냈다”고 하는가 하면 “문재인 후보가 대구에서 ‘대통령 당선 안 되면 대구 강물에 빠져 죽겠다’고 했다”고도 주장했다. 또 박지원 대표는 수차례에 걸쳐 참여정부의 ‘호남홀대론’을 반복 언급했다. 전형적인 지역감정에 기댄 발언이다.

국민의당 내부에서 ‘박지원 백의종군론’을 제기하는 흐름도 있지만 박지원 대표 본인은 “문재인 좋은 일 시키는 것”이라며 이를 일축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둘러싼 논란이 쉽게 정리될 것 같지는 않다. 최근 ‘유승민 사퇴론’의 물꼬를 터뜨린 이종구 바른정당 정책위의장은 최근 기자들과의 오찬간담회에서 “안철수 후보가 (박지원 대표 문제를) 기술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발언한 걸로 알려졌다. 박지원 대표가 사퇴하면 안철수-유승민 단일화가 가능하다는 말로도 들린다.

즉, 이런 맥락에서 보면 박지원 대표가 사퇴 등의 ‘2선 후퇴’를 선택하는 경우가 발생하더라도 안철수 후보가 선거공학 대신 ‘새정치’를 택한 거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이다. 오히려 이는 ‘선거공학’의 완성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최근의 색깔론과 지역감정 조장은 선거공학이라는 큰 틀에서 동전의 양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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