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가 드디어 보수 본색을 확실히 드러내네요. 지금 돌아보니 그가 한때 민주당과 연을 맺었던 것, 그리고 부산에서 자란 그가 호남 토호세력들을 모아 국민의당을 조직하고 호남에서 똬리 튼 것도 성체가 되기 전에 잠시 진보의 태 내지는 가면을 빌려 쓴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니냐고요? 천만에. 최근 그가 대선 판도에서 하나씩 펼쳐 보이고 있는 그림들을 보세요. 그는 스스로 촛불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사드 배치도 반대에서 찬성으로 뒤집었습니다. 개성공단·금강산관광에서도 부정적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박근혜 정부와 재벌들이 그토록 소망했던 규제프리존마저 허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대충 몇 개만 예로 든 게 이 정도입니다. 이렇게 안철수는 대선 한 달 여를 앞두고 문재인에 맞설 수 있는 유의미한 보수진영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는 이제 조갑제를 비롯해서 박사모 일베 등 탄핵반대세력이 그에 대해 비판적 지지를 선언해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작금의 안철수는, 이전에 조선일보가 정치적 사안마다 시시콜콜 지시했던 것들을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새누리당 한나라당 신한국당이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듯이, 조선일보가 훈수하는 대로 착실하게 보수의 길을 걸어가는 '조선일보 아바타'가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합니다.

국민의당 안철수 대선후보가 11일 오전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차기정부 중소기업 정책 관련' 대선후보 강연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조선일보는 한국의 정치인들을 거의 칭찬하지 않습니다. 권력에 대한 비판을 언론의 숙명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 이 말은 조크로 받아 주십시오 - 아무튼 조선일보에게 칭찬받은 정치인은 극히 드문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바로 안철수가 그 몇 안 되는 희귀한 케이스에 속합니다.

안철수가 박근혜 탄핵 이후 촛불집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천명했을 때, 조선일보가 대견한 표정을 숨기지 못 하고 그에게 뭐라고 치하했는지 아십니까? 그의 소신 덕분에 "'정치인 안철수'를 다시 보게" 됐답니다. 들어 보시죠.

"국민의당 대선 주자인 안철수 전 대표는 작년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 가결 이후 촛불 집회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여전히 경쟁하듯 촛불 시위에 나오는 다른 야권 주자와는 다른 모습이다. 안 전 대표는 "정치인은 소신대로 행동하고 평가받는 것"이라고 했다. '정치인 안철수'를 다시 보게 만든다."(사설, <"헌재에 맡기자" 촛불 들기를 멈춘 안철수의 소신>, 2017.02.21)

'다시 보게 됐다'는 말, 이건 입이 짧은 조선일보 입장에서 엄청난 칭찬입니다. 이런 칭찬은 안철수가 자신이 속한 국민의당의 당론인 사드 반대를 석연찮은 이유로 갑자기 뒤집어 찬성 쪽으로 돌아섰을 때 다시 등장합니다. 조선일보가 다시 보고, 보수층도 다시 본다는 안철수의 위엄이 사뭇 대단하지 않습니까?

"안 후보는 사드 배치를 뒤집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문 후보가 즉각 재개하겠다는 개성공단·금강산관광도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했다. 보수층이 안 후보를 다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사설, <안철수, '非文'을 뛰어넘는 가치가 뭔가>, 2017.04.05)

심지어 최보식 조선일보 선임기자는 <안철수만 보고 있으면 안 보이는 것>이라는 제목을 단 4월 7일자 칼럼에서, 안철수의 말 바꾸기와 정치적 변신을 변호하여 가로되 "잘못을 수정할 줄 아는 유연성은 평가받아야 한다"고 따스하게 감싸기도 했습니다.

"국민투표까지 해야 한다는 그가 몇 달쯤 지나 사드 배치 찬성으로 돌아섰다. 그는 "반대했을 때는 사드 배치 합의가 이뤄지기 전이었다. 이미 진행된 이상 국가 간 합의를 존중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입장을 바꾼 것은 큰 허물이 아니다. 정치를 하면서 말을 안 바꿔본 후보란 거의 없다. 오히려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고집하지 않고 옳다는 방향으로 수정할 줄 아는 유연성은 평가받을 만하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선 후보(왼쪽)와 국민의당 안철수 대선 후보가 12일 오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대한민국, 어떻게 바꿀 것인가!'란 주제로 열린 2017 한국포럼에 참석해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단일화를 둘러싼 안철수와 조선일보 간의 공명도 빼놓으면 섭하겠지요. 보수진영의 몰락으로 특징지어지는 19대 대선의 해법을 조선일보는 "'문재인 아닌 것'(anything but Moon)의 연합에서 찾았습니다. '아무거나(anything)'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던 안철수가 문재인의 맞수로 성장하기까지 이런 전략이 큰 역할을 했음은 부인하지 못 할 것입니다.

"문씨의 독주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또 하나의 장치는 범(汎)보수 후보들의 단일화다. 적절한 시기가 오면, 또 혼자의 힘으로는 문씨의 집권을 막을 수 없다는 판단이 선다면 여권 또는 보수층을 대변하는 주자들은 과감히 한 사람에게 힘을 모아줘야 한다..."(김대중 칼럼, <'문재인 아닌 것'의 연합>, 2017.01.31)

그리고 '규제프리존 특별법'을 두고 안철수의 문재인 간에 정치적 공방이 벌어지자, 조선일보는 오늘(12일) <규제프리존 법도 '적폐'라는 건가>라는 사설을 통해 '규제프리존 법을 통과시키자'는 안철수 주장에 대립하는 문재인에게 격한 적개심을 드러냈습니다.

"문재인 민주당 후보 측은 "이 법은 박근혜 정부가 입법 대가로 대기업에 돈을 요구했다는 의혹을 받는 대기업 청부 입법"이라면서 "안철수 후보가 '이명박 박근혜 정권' 계승자임을 드러냈다"고 비판했다. 규제프리존 특별법도 '적폐'라는 식이다... 만사를 이렇게 정치적으로 비틀고 왜곡해서 보는 사람들이 중소기업을 육성한다면서 중소기업청을 중소벤처기업부로 승격시킨다고 한다... 이대로면 희망이 없다."

조선일보와 안철수는 이렇듯 서로 통하는 게 많습니다. 어떻게든 문재인을 꺾고 대권을 잡겠다는 것이 안철수의 꿈이라면, 조선일보는 그런 그를 이용해서 '적폐청산'을 부르짖는 촛불세력의 집권을 저지하고 대한민국의 권력을 제 손으로 계속 주무르겠다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안철수와 조선일보는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하고 있다고 봐도 되겠지요.

사정이 이럴진대 안철수를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촛불세력의 하나로 간주하는 게 가당한 일이겠습니까? 아니오. '청산되어야 할 적폐의 모든 것'을 대표하는 조선일보는 안철수와 더 이상 둘이 아닙니다. 보수 본색으로 무장한 안철수는 '조선일보의 아바타'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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